2008. 6. 26. 08:56ㆍ미련이 남아있는 마라톤 이야기/완주기(마라톤, 울트라)
그 곳에 있어 진정 행복하였네라
힘들여 오랜 시간을 뛰어야 하는 마라톤대회를 왜 축제라고 하는지를 오늘에서야 알았다.
내가 처음으로 참가한 춘천마라톤은 감동의 물결로 가득한 화려한 축제였다.
몇 시간에 걸쳐서 자신과 처절한 싸움을 벌이지만 마침내 결승지점을 통과할 때는 모두가 다 승자가 되어 환하게 웃는 아름다운 싸움이었다.
빨리 달린 사람은 기록이 빨라서 기쁠 것이고 느리게 달린 사람은 완주하였다는 기쁨에 온 몸이 젖는 소중한 체험을 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참가하여 달리다가 어느 순간에 닥친 육체적인 고통때문에 중간에 멈춘 사람들일지라도 다시 일어나서 달리고 싶은 마음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 한 언젠가는 이런 기쁨을 누릴 자격이 있는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불혹을 훨씬 넘긴 어느 해 가을에 그 축제의 한 가운데 서 있어서 진정 행복하였고 다음 번에도 나 자신은 물론이고 참가하는 누구나 이런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을 하면서 이 글을 쓴다.
오래 전에 참가 신청을 하고 난 후에 대회 날짜가 가까워지면 은근히 스트레스가 생긴다.
더구나 요즘은 가을철이라서 변화가 많은 바다 날씨에 신경을 써야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일기 예보 사이트에 들르고 날씨 안내전화인 131번을 누르고 바다를 쳐다보고........
섬에서 달리는 달림이의 피말리는 긴장은 나날이 계속된다.
또 직장의 윗분들 눈치를 봐야하고........
며칠 동안은 바다가 뒤집힐 거라는 주간 일기 예보를 알아보고 난 뒤라서 나오기 전까지도 마음이 착잡했다.
여느 대회 같았으면 포기를 했을 정도였다.
학교에 연구시범학교 공개라는 행사가 수요일날 있는데 윗분들이 신경을 곤두세운 듯하여 섬에서 뭍으로 나오자니 마음에 걸렸다.
아이들 모집하는 일이 지상과제인 시골의 실업계 고등학교에서는 인근 중학교에 좋은 인상을 심어줘야 하는데, 이번 공개 행사가 학교를 홍보하는 절호의 기회이니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어서 연지찍고 곤지찍고 이쁘게 신부화장을 하는 셈이었다.
며칠 동안 거의 모든 선생님들이 매달려 학교 환경을 확 바꿔 놓았는데 게으른 나는 그저 멀건히 바라보는 것으로 대신했으니........
담임을 맡은 우리 교실의 환경 정리도 나오는 날 오전에 급하게 대충 출력물을 몇 장 붙이는 걸로 해치우고.......
해양생산과인 우리 반은 아이가 모두 넷뿐인데 단순한 일조차 맡아서 할 아이가 없으니.........
연가를 얻는다고 결재를 받으러 가는 것도 일 때문에 허둥대다가 배를 타러 부두에 나오기 30분 전에 교장실로 갔다.
자주 나가야 하니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들 수가 없을 지경이지만 그 동안에 춘마에 참가하다고 목표를 정해두고 제대로 달리기 위해서 흘린 땀이 아까워서 낯 두껍게 근무상황부를 슬그머니 내밀었다.
그동안 틈이 날 때마다 찍어서 인화해 둔 울릉도의 풍경 사진을 환경정리용으로 몇 장 학교에 준 것을 액자에 넣는다고 육지에 주문을 의뢰했는데 그걸 찾아오라시면서 출장을 달아 놓고 나가라는 배려를 해주셨다.
고마운 배려에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평소에도 직장생활에 이런저런 도움을 주는 정이 많은 동료선생님 한 분이 교장실에서 나오니 미리 차를 대기 시켜두었다가 부두까지 급하게 차를 몰아서 태워주셨고........
마음이 급한 탓이었는지 배에 올랐을 때는 온 몸이 땀으로 젖어있었는데 사다리를 올라가서 배 입구에 들어가다가 만난 선박출입항 통제관이 웃으면서 "나가시는 김에 한 며칠 푹 쉬다가 오십시오" 하면서 인사를 하길래 물어보니 오늘 저녁부터 폭풍주의보가 내리면 한 며칠 동안은 배가 못 다닐 거란다.
월요일날 오전에 들어와야 하는데 수요일쯤에나 배가 다닐 것이라고 하니 속이 더 답답해졌다.
도로 내려가고 싶을 지경이었다.
저녁에 포항에 닿아서 집에 가서 아이들 얼굴을 대충 보고 토요일날 낮 1시에 법원 앞 훈련 장소에 모여서 클럽에서 대절한 버스를 타고 멀고도 먼 춘천으로 향했는데 가는 도중에 원주 근처 터널에서 추돌사고가 있어서 교통을 통제하는 바람에 국도로 돌아갔는데 한꺼번에 몰려든 차량들 때문에 도로에 심하게 정체가 되었다.
숙소로 정해둔 춘천 인근의 농원에 도착하니 저녁 8시가 넘어 버렸다.
집에서 한 시간이나 걸리는 통근 거리에 근무를 하는 아내와 중학생인 아들 녀석을 함께 춘천에 데리고가느라 약속 시간보다 모이는 장소에 10여분이나 늦게 간 것 때문에 길이 밀릴수록 내 탓인 양하여 속으로 무척 미안하였다.
생애 처음으로 참가한 풀 코스 대회인 제천 대회에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나 혼자 보냈다고 아내가 무척 미안해 하길래 다음 번 춘천대회에는 함께 가자고 약속을 해 두었기 때문이었고 엄청난 인원이 참가하는 전통있는 대회의 모습을 가족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에 무리를 해서 함께 간다고 서둘렀지만 아침에 출근할 때 조금 일찍 마치고 나서 택시를 타고 달려온다던 아내가 사정이 생겨서 갑자기 태우러 오라는 바람에 늦어버린 것이다.
오리 불고기와 된장찌게로 늦은 저녁을 먹고 나서 여자회원과 따라온 가족을 제외한 서른 명 정도되는 남자 회원들이 큰 방에서 함께 잠을 잤는데 모두 큰 대회를 앞둔 긴장 탓인지 저녁 식사 후에도 들뜬 분위기도 없었고 대회에 관련된 정보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열 시쯤 해서 잠을 잤는데.........
정확하게 새벽 2시 9분에 깬 후에는 잠을 더 잘 수가 없었다.
잠을 조금이라도 더 자려고 숫자를 세고 긴장을 이완한다고 호흡을 해봐도 더 이상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잠자리 근처에 있는 실내 화장실 들락거리는 소리, 가볍게 코를 고는 소리........
다른 이들의 수면에 방해가 될세라 불도 켜지 않고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데도 내 신경이 바늘 끝처럼 날카로운 탓인지 잠을 잘 수가 없었으니 어지간히 긴장을 한 모양이었다.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출입문 밖이 훤해질 무렵에 일어나니 눈이 섬벅거렸고 머릿속이 무거웠다.
그러나 올라오는 동안이나 저녁 내내 함께 움직이는 동안에 클럽 집행부에서 고생을 하며 워낙 치밀하게 여러 가지 준비를 많이 한 탓에 처음으로 단체로 달리기 대회에 참가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어서 차츰 안정이 되어 갔다.
아침밥을 먹기 전에,
어떤 이들은 젖꼭지에 밴드를 붙이고.........
나는 바셀린을 바르고........
이런 저런 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였고 인대나 근육의 통증으로 불편을 호소하는 몇몇 회원들에게 지난 여름 방학 때 양호겸직교사 연수에 가서 간단하게 배운 테이핑을 해 주었는데 효과가 컸다면서 대회가 끝난 후에도 몇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과분하게 들었다.
대회장인 춘천 공설운동장에 도착을 하니 행사진행 요원들과 엄청난 수의 달림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즐비한 플랭카드하며 방송사의 장비와 각종 천막인 부스 등이 엄청나게 많아서 한 눈에 준비가 잘 된 거대한 규모의 대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난 주말에 나리 분지에 뛰러 갔다가 시간을 내어서 천부로 내려가서 성당에서 성사를 보았기 때문에 기쁘게 가톨릭마라톤 동호회에서 주관하는 미사에 참여를 했고 총무 일을 맡아서 고생을 하시는 오광호 프란치스코님과 지난 번 대전대회 때 미사를 집전하신 낯이 익은 회장 신부님을 뵈었다.
미사 전에 인사를 드리고........
같이 간 클럽의 회장님과 이경미선생님 가족도 신자라서 함께 미사에 참여를 했다.
함께 달리시는 일곱 분의 신부님들이 집전한 미사가 끝나고 나서 참가한 형제자매님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었고.......
나는 이번에도 울릉도에서 왔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많은 박수를 받았다.
미사를 마치고 운동장으로 내려와서 바로 달릴 준비를 한다고 운동장 밖에서 20여분 정도를 천천히 뛰고 나서 관절을 풀고 스트레칭을 했다.
몸에 기름기가 빠진 탓인지 추위 때문에 운동장에 모일 시간인데도 겉옷을 선뜻 벗어 맡기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10시 반이 지나서야 마침내 파시코에서 제공하는 비닐 봉지를 둘러쓰고 운동장 가운데로 가서 출발 시간을 기다렸다.
대회에 참가 신청을 할 때 풀 코스 공식 기록이 없어서 처음 참가자 그룹인 8000번대의 H조에 속해서 출발을 해야 했다. 기록에 욕심을 내자면 초반에 어느 정도의 속도로는 달려야 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일부를 헤치고 나가자면 엄청나게 힘이 들 것 같아서 달리기도 전에 걱정이 많이 되었다.
나중에 5킬로 정도를 달리면서 추월하고 보니 10000번대 이후의 번호들이 여럿 있었는데 주최측에서는 자기 번호의 지정구역에서 대기하다가 차례가 되면 출발하라고 당부했고 그렇지 않으면 다음 대회부터는 참가 제한 등의 불이익을 준다고 했는데 과연 그것이 지켜질까? 아니면 차례를 지킨 사람만 손해를 보았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다면 혼잡을 피해서 출발을 하기에 좋은 이 제도가 무산될까 염려스럽기도 하다.
11시가 좀 지나서 등록선수들이 먼저 출발을 하고난 뒤에 트랙으로 나와서 차례를 기다리다가 순서를 지켜서 출발을 했다.
앞서 2주일 전에 험하다는 제천 코스를 점검주 삼아서 한 번 달린 탓에 코스에 대한 걱정은 별로 없었다. 더구나 춘천은 코스가 좋다고 이미 달려 본 분들이 하는 이야기를 몇 번 들었고 비가 온다고 해서 걱정을 했던 날씨도 구름만 잔뜩 끼어서 시원하였으므로 오히려 달리기에는 적당한 날씨여서 속으로 기록을 한 번 내보자는 다짐을 하고 출발선을 통과했다.
출발을 해서 운동장을 벗어난 이후에는 초반부 내내 예상대로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나가느라고 애를 먹었다. 특히 갑자기 도로가 좁아져서 병목 현상이 일어나는 곳이 몇 군데 있어서 앞 사람을 추월하는 것이 무척 힘이 들었다.
초반의 완만하지만 긴 오르막을 벗어나서 의암호로 접어드니 단풍빛이 고운 아름다운 호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혼잡한 사람 사이를 피해서 달리면서도 내내 사진을 한 컷 찍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정말 가을빛이 고르게 밴 아름다운 호반 풍경이었다.
그리고 거대한 물결로 이어지던 참가자들이 함성은 호반을 둘러싼 아름다운 가을산에 메아리쳐서 가슴께로 와 닿았다. 벅찬 기쁨이 고통보다 앞서는 순간순간이었다.
의암교를 지나면서부터 보이기 시작한 페이스 메이커들이 좁은 도로의 한가운데를 달리니 뒤따르는 사람들이 길을 막고 우루루 달리는 바람에 몇 번이나 도로 가장자리에서 밖으로 나가서 무리하게 달려야 했다.
참가자로 길이 비좁은 이런 경우에는 페이스 메이커를 따라서 뛰는 사람들이 도로의 한 쪽 차선으로만 달리든 가 아니면 오른쪽으로 붙어서 달리고 왼쪽 주로는 추월해가는 사람들을 위해 남겨두는 것이 런티켓에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도 사람이 많으니 가끔씩 다른 이들과 몸이 부딪히기도 하고........
그럴 때마다 신부님이 강론 도중에 말씀하시던, 달릴 때는 신자답게 런티켓을 지키면서 모범이 되게 달리라고 당부하시던 말씀을 되새기면서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인사를 하고 달렸다. 함께 달리는 분들도 서로 먼저 미안하다고 하셔서 혼잡했지만 기분 좋게 달릴 수 있었다.
전반부 페이스는 목표 시간인 3시간 29분을 기준으로 앞의 제천 대회에서 후반에 언덕길을 달리면서 고생을 한 기억을 되살려서 인파에 대비한다고 102분으로 다소 느긋하게 잡았는데 아주 적절하게 배분을 했는지 달리면서 팔목에 적어둔 시간을 5킬로 마다 체크해보니 거의 몇 초 여유 있는 차이로 통과를 하여 예정 시간을 제대로 지킬 수 있었다.
처음 5킬로미터는 26분 30초 페이스로, 그 이후에는 대략 23분 30초 페이스로 달렸다.
후반에 혹시 올지도 모르는 탈진을 대비해서 다소 여유있게 시간을 배정해 두었지만 수천 명이나 되는 앞사람을 헤치고 달려나가는 마음은 늘 다급하였다.
달리는 도중에 앞서서 출발을 한 포항마라톤 클럽의 회원들과 인터넷 클럽인 런다이어리회원들을 여럿 만났다. 더러는 인사를 나누고 바쁘게 지나쳐서 앞으로 빠져나갔다.
늘 좋은 정보를 올려 주시는 달리는 의사 모임 소속의 8000m 김학윤님, 대전 MBC 대회 때 만나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생소한 마라톤 시계의 랩 타임 사용법을 가르쳐 주시던 철인 김인철님, 그리고 일지에서 오래동안 서로 안부를 묻고 하여서 이름은 친숙하지만 처음으로 얼굴을 보게 된 수원의 악바리 권세형님, 런다의 대선배이시며 각종 대회에서 반갑게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부산의 금정산지기 장영수님과 님의 달리기 파트너이신 사직황새 김은로님, 울산 현대산악마라톤 대회에 함께 참가한 인연으로 달리기 일지를 읽고 늘 잊지 않고 격려를 하여 주시는 창원의 알렉스 신호범님과 그리고 이번에 런다회원들을 위해 준비하느라 고생을 하신 춘천의 현팔이님도 뵈었는데 춘천아씨께서 내 이야기를 몇 번 하더라는 말씀을 듣고 출발을 하기 전에 시간을 내어서 런다 현수막에 들리지 않고 온 것이 마음에 걸렸다.
주로에는 많은 주민들이 가족과 함께 나오셔서 응원도 해 주시고 마실 물도 공급하여 주면서 힘을 내라고 격려를 보내주었는데 달리는 내내 참 고마웠다.
공식 급수대의 혼잡을 피하고 갈증 해소를 위해서 마을 앞에 마련된 간이 급수대에서 몇 번 물을 얻어 마셨다.
목마를 때 마실 물을 한 잔 주시는 인정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15킬로 지점을 지날 때 쯤일텐데 길가의 어느 농가 마당에서 연세가 여든은 더 되어보이시는 백발의 연로하신 할머니 한 분이 손을 흔드시며 격려를 해주셨다. 노쇠한 분이시던데 제자리에 서서 오랫동안 손을 흔들어 주셔서 갑자기 왈칵 고마움 때문에 눈물이 났다.
또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났다.
40여년도 더 지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병으로 사경을 헤매는 어린 자식이던 내 동생을 등에 업고 백 리가 넘는 길을 걸어서 용하다는 의사를 찾아다녔다는 지친 어머니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병약한 어린 생명을 살려보려고 그토록 온갖 고생을 하시고도 가난 때문에 어린 자식을 먼저 보낸 그 한을 어찌 세월이 흐른다고 잊으셨으랴......
달리기를 시작한 이후에 비교적 먼 거리를 달릴 때마다, 영일군 대송면 동촌에서 경주군 양남면 하서리까지 백 리가 훨씬 넘는 길을 두려움과 안타까움으로 타는 가슴을 부여잡고 피붙이 어린 자식을 살려보겠다고 밤낮으로 걸어다니셨다고 한숨을 섞어서 이야기하시던 일이 가끔씩 생각이 났다.
그 백 리가 넘는다는 먼 길을 이제 마흔을 훌쩍 넘긴 아들이 스스로 원해서 기쁘게 뛰고 있으니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지만 어찌 그 이야기를 잊을 수 있으랴
가끔씩 지나치게 술을 마시는 버릇 때문에 자주 애를 태우던 이 아들이 술의 유혹에서 벗어난 뒤에 이렇게 뛰고 있고 오늘은 특별미사에서 성체도 모셨으니 아시고 기뻐하시리라.
그리고 다리가 불편한 젊은 아저씨 한 분이 길가에서 큰 소리로 힘내라고 고함을 지르고 계셨다. 바지의 한쪽 가랭이가 비어있었는데 고함을 지르는 그 분을 보는 순간 성한 두 다리로 달린다는 것이 고맙고도 미안했다.
코스의 중간 지점에 있다던 두 곳의 언덕은 예상보다는 짧고 그렇게 가파르지 않아서 달릴만했다.
20킬로를 넘어서니 앞서서 달리는 사람들이 차츰 줄어들어서 달리는데 조금씩 여유가 생겼다.
30킬로 지점을 별 다른 어려움 없이 통과하고 나니 기록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이왕 목표를 세우고 달리는 것인데 다소 늦추어진 보스톤 참가 기록에 겨우 턱걸이를 할 것이 아니라 이왕이면 종전 제한 기록이었던 25분 안에 골인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체크해보니 이미 30킬로 통과 기록이 목표보다 1분 30초 정도 빨랐고 이후 코스는 별 무리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탓에 욕심이 생겼다. 대회에 참가하여 입상은 꿈도 못 꾸는 것이고 결코 목표가 아니니 어차피 좋아서 달리는데 의도했던 대로 달리고 나면 결과야 어떻든지 간에 실패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는 도중에 부대 앞을 지나 올 때마다 길가에 늘어선 군인들이 목소리를 높여 힘껏 응원을 해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느 부대에서는 이제 막 자대 배치를 받은 신병들이 300명 정도 나와서 응원을 했다고 한다.
내가 줄곧 남자 고등학교에 근무를 했으므로 이 군인들 가운데 내 옛 제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는 더욱 더 힘을 내어 달렸다.
지루하다는 마지막 5킬로 구간을 달리는 도중에 다리에서 이상의 징후로 보이는 신호가 가끔씩 왔다. 그러나 호흡은 안정이 되어 있었고 주변에서 같이 달리고 있는 대부분의 달림이들보다 여전히 빠르게 달릴 수 있었으니 지치거나 기운이 그리 떨어지지는 않은 듯 하였다. 그래도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속도를 조금 늦추었다.
후반의 각 5킬로미터 구간 통과 목표 시간을 여유있게 잡았기에 느긋하였지만 어느 순간에 갑자기 닥친다는 최악의 마라톤벽에 부닥칠 경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왕이면 기록을 좀 더 당겨놓아야 다음 대회 때부터는 내가 오늘 뒤에서 출발을 하여 사람들을 헤치고 달리느라고 겪은 초반의 어려움 대신에 기록순 출발의 혜택을 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달리는 내내 살펴보니 역사가 깊은 국제 공인대회답게 거리 표지판이 잘 되어 있었고 정확하고 믿을만하니 달리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급수 예정 위치를 미리 알려주는 표지판을 설치해 둔 것도 좋았다.
급수대도 테이블이 몇 개쯤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알 수 있도록 일일이 번호를 매겨 두어서 혼잡을 피해서 여유있게 뒤에 있는 것을 이용할 수 있어서 좋았다.
잡다한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 속에 가득한데도 몸은 여전히 잘 움직여 주었다.
길가에 서서 응원을 해주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하는 시내를 통과하니 어느 사이에 운동장 입구로 진입을 하는 곳이 보였다.
얼마 남지 않았다고 힘을 내라는 시민들의 반가운 외침이 뚜렷하게 자주 들려왔다.
드디어 길고도 긴 시간을 멀고도 먼 길을 달린 끝에 아침에 몸을 푼다고 가볍게 달려서 왔다갔다하던 운동장 입구 쪽에 이르렀다.
머리 속에는 기쁨이 일기 시작하는데 운동장 4문 진입로 100 미터 전쯤에서 기어코 오른쪽 다리 장딴지에 경련이 일어났다.
쓰러질듯하여 갑자기 멈추었더니 근처에 서 계시던 아주머니 한 분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도와 주신다고 다가오셨다. 괜찮다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멈추어 서서 길게 다리의 장딴지 근육을 스트레칭를 해보니 다행이 통증이 좀 가셔서 다리의 상태는 그런 대로 나머지 거리를 조심스럽게 달릴 만 했다.
환호와 함성이 들리는 운동장 트랙의 마지막 코너를 통과한 후에 잠깐 시계를 보니 25분을 넘기지 않을 듯하여 결승지점을 통과하는 순간에 멋지게 사진 찍히려고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며 포즈를 취한 다음에 통과했다.
대략 3시간 24분 초반의 기록이었다.
골인 지점 뒤의 제한선 밖에서 내 옷을 들고 "아부지" 하고 부르며 웃고 있는 막내인 아들 녀석의 얼굴이 보였다.
또 한 번의 풀 코스를 이렇게 무사히 달렸다는 안도감에 힘들었지만 웃음이 나왔다.
더구나 생애 두 번째 풀 코스 도전인 이번에는 마지막에 걷다가 달리다가 한 첫 번째와는 달리 중간에 한 번도 걷지 않고 전 코스를 당당하게 달렸으니 더욱 더 내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잔디밭을 가로 질러가서 칩을 반납하고 완주 메달을 받았는데 디자인이 특이하고 대회 로고가 산뜻하여 마음에 쏙 들었다.
역시 여러 면에서 지금까지 참가했던 몇몇 소규모 대회와는 다른 춘마의 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메달을 받아들고 돌아나오다가 우연하게도 동명이인이며 대구에서 소망정형외과의원을 운영하시는 이원락원장님을 만났다. 언젠가 우연하게 이야기를 들은 우리나라 풀뿌리 마라톤의 대가이시자 이론가인 이 분을 꼭 한 번 뵙고 싶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쉽게 행운이 찾아왔다. 칩 반납 장소 앞으로 걸어 나오는데 점잖게 생기신 나이 드신 어른이 한 분 잔디밭에 앉아서 쉬고 계시길래 가슴 쪽에 붙은 번호표를 보니 800번대 여서 혹시나 하고 이원장님이신가고 여쭈어보니 반갑게 본인이 맞다고 하셨다.
땀을 많이 흘리고 완주 한 후에 닥치는 추위도 잊은 채 몇 분 동안이나 마주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짐작한대로 달리기에 대한 철학이 확고하신 대단한 분이셨다.
나보다 12년이나 연배시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고 젊어보이셨다. 달리기 이외에도 환경운동이나 시민연대 등에도 여러 곳에 참여하신다고 하셨다.
선수 이외에는 아무도 힘들다고 마라톤을 하려고 하지 않던 십여 년 전에 낙동강 페놀 사건을 지켜 본 후에 환경문제에 대한 경각심 때문에 그 전까지 즐겨하시던 골프를 그만 두시고 무공해 운동인 달리기를 시작하셨다고 한다.
한참 이야기를 나눈 후에 다음에 다시 뵐 것을 약속드리고 돌아서는데 옷을 들고 나를 찾아서 두리번거리는 아내가 내 눈에 먼저 들어왔다.
혼자 섬에 가 있으면서 먹는 것도 부실한데 내가 힘들게 달린다고 늘 안스러워 하던 아내가 오늘은 활짝 웃고 있었다. 아내와 함께 클럽 천막으로 돌아와서 따뜻한 우거지 국밥을 한 그릇 맛있게 먹었고 먼저 도착한 클럽의 고수 회원들의 축하인사를 받았다. 조금 쉬다가 가볍게 주변을 움직이면서 뭉친 다리의 근육을 풀고 이후에 들어오는 회원들에게 축하의 인사로 먼저 축하받은 고마움을 대신 갚아 나갔다. 회원들 대부분의 기록이 예상보다는 좋아서 고통스런 완주 뒤였지만 얼굴 표정들이 한결같이 밝았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어오는 완주자들을 박수로 격려하면서 잠시 쉬다가 마지막 회원이 들어온 후에 짐을 정리하여 운동장 앞으로 걸어나와서 차로 이동하였고 기쁨 속에 짧게 머물렀던 춘천을 떠나 아쉽지만 멀고 먼 귀가길에 올랐다.
나에게는 마라톤 완주가 단순한 달리기의 목표만이 아니고 술에 젖어 무절제하게 살아온 허망한 지난 삶의 물꼬를 돌리는 삶의 전환점인 동시에 내가 원했던 활기찬 중년의 다른 삶의 길로 들어서는 길목이다.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기념할 일도 많겠지만 달리기를 시작한 이후로 오랫동안 꿈꾸며 벼르고 준비해왔던 춘천마라톤을 처음으로 완주한 오늘은 또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수 백리 뱃길을 건너서 섬에서 뭍으로 달리러 나오는 것이 힘이 들수록 그리고 나이를 한 살씩 더 먹어갈수록 내 달리기는 더욱 힘차게 이어질 것이다.
언젠가는 기록이 아니라 달리기 대회에 참가하는 것 자체를 즐거움으로 아는 진정한 풀뿌리 달림이가 되고 싶다.
그리고 언제쯤에나 가능 할 런 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우리 가족 모두가 춘천의 호반을 함께 달릴 그 날을 기다린다.
덧붙여서 :
꿈속 같은 닷새를 보내고 수요일인 오늘 오전에 섬으로 돌아왔다.
혹시나 하루 이틀 빨리 뱃길이 열릴지 모른다는 기대는 무산되고........
오늘은 다른 날보다 1시간 정도 더 시간이 걸려서 도착하니 이미 공개수업은 진행 중이었고.........
가만히 손꼽아 보니 5박 6일이 걸렸으니 해외(?)대회에 참가한 경우답게 길고도 긴 일정이었다.
배멀미는 아직 가시지 않았지만 내년 가을이 다시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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