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6. 26. 08:49ㆍ미련이 남아있는 마라톤 이야기/완주기(마라톤, 울트라)
못 들어왔지요?
포항부두를 출발 한지 20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배는 심하게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쾅쾅거리며 배 밑창을 때리는 성난 파도의 역정에 배가 흔들리면서 기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낯선 섬으로 떠나는 여행의 설렘으로 쉬임 없이 떠들던 아주머니들의 비명소리가 이어졌다. 통로 사이로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바람에 수숫대 꺾이듯이 쓰러지며 나뒹굴기도 했다. 섬에서 근무를 하는 세 해 동안에 수십 번도 더 배를 타고 다녔지만 이렇게 심하게 요동을 친 경우는 처음이었다. 푸른색 비닐 봉투를 입에 대고 토사물을 쏟아내는 아주머니들의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이어지면서 아래층 선실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오래 전에 마라톤대회에 참가 신청을 하고 난 후에 대회 날짜가 가까워지면 은근히 스트레스가 생긴다. 더구나 요즘은 이른 봄철이라서 변화가 많은 바다 날씨에 신경을 써야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일기 예보 사이트에 들르고 날씨 안내전화인 131번을 누르고 바다를 쳐다보는 조바심 속에서 섬에 사는 달림이의 피를 말리는 듯한 긴장은 나날이 계속된다.
금요일부터 주말까지 바다가 뒤집힐 거라는 주간 일기 예보를 알아보고 난 뒤라서 나가기 전까지도 나갈 수 있을지 여부를 몰라서 마음이 착잡했다.
동아마라톤에 처음 참가하기 위한 출전권을 얻느라고 지난 가을에 연이은 풀코스 대회 참가로 몸이 채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경주오픈대회에 참가하였고 예상보다는 좋은 기록으로 참가권을 보장받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한 번이라도 서울 한 복판을 달려 보았더라면 대회에 참가하는 것을 포기를 했을 정도였다.
지난 가을에 대회에 참가한다고 뭍으로 나왔다가 번번이 제 때에 들어가지 못한 전력이 있는 탓이라서 연가를 신청한다고 결재를 받으러 가면서도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들 수가 없을 지경이었지만 그 동안에 동마에 참가한다고 목표를 정해두고 어깨 부상에도 불구하고 겨울 내내 달리면서 흘린 땀이 아까워서 낯도 두껍게 근무상황부를 슬그머니 윗분 앞에 내밀었는데 물끄러미 쳐다보는 윗분의 얼굴색이 갑자기 바뀐다.
12월 중순에 출근을 하다가 빙판길에 넘어지면서 다친 어깨의 통증이 석 달이나 지났는데도 끊이지를 않아서 몇 번이나 포기를 할까하고 망설였지만 한 번 달려보자는 쪽으로 결심을 굳혔다. 연초에 연습도 없이 무리하게 참가한 고성대회에서 풀 코스의 1/3쯤인 마지막 14킬로미터는 지쳐서 걷다가 달리다가 한 것이 오랫동안 마음에 걸렸고 한 번 포기를 하면 마라톤을 영영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달리면서 힘들 때마다 내 자신에게 늘 묻던 말에 대한 답을 스스로 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이유도 있지만 다시 또 깊고 깊은 알코올 중독의 수렁 속으로 들어가기가 싫어서 달리는 것이다. 술을 많이 마시고 난 뒤의 혐오스러운 내 모습을 다시 보는 것이 달리다가 고통스러움을 겪는 것보다 더 두려웠다.
결코 길지 않은 내 생애 동안에 술은 참으로 질기고 질긴 인연으로 내 발목을 잡았고 사고와 후회의 반복으로 서른 해를 보냈다.
혼자 와 있는 섬 생활의 외로움을 엿본 술이 웃으며 다가왔고 그 묘한 웃음에 넋을 뺏긴 나는 술과 친구가 되어서 또 후회를 되풀이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떻게 그토록 먼 거리를 달릴 생각을 했을까? 내가 생각해봐도 신기할 정도로 불과 한 해 전에는 마라톤 풀 코스 완주는 먼 남의 일로 느껴졌다. 아니 그 거리의 절반을 달리는 일도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으로만 여겨졌다. 지난 해 2월 하순의 어느 날 처가에 갔다가 막내 동서 부부가 참가한 하프마라톤 대회에 가족들과 함께 구경을 간 것이 달리기를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아이들은 가쁜 숨을 몰아 쉬고 결승점을 통과한 젊은 막내이모와 이모부를 영웅 대하듯 했다. 나도 한 번 달려보고 싶었다. 그래서 술에 절어서 지내는 부끄러운 아비가 아니라 커 가는 자식들에게 자랑스럽고 당당한 아비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돌아오는 길 내내 머리 속에 맴돌았다. 섬으로 돌아와서부터 학교 운동장을 달리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신어서 바닥이 닳아서 얇아진 낡은 운동화를 신고 달리다가 일주일도 못되어서 발바닥과 무릎에 통증이 와서 좌절을 겪은 온 이후로 한 해 동안 좁은 운동장을 참 많이도 돌고 돌았다. 때로는 가파른 언덕이 많은 섬 둘레를 한 바퀴 뛰어서 돌기도 했고 나리 분지의 숲길을 달리기도 했다. 그토록 마셔대던 술은 달릴 욕심으로 하루아침에 끊을 수 있었고 천성이 변했으니 죽는다는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나를 이길 수 있는 남모를 기쁨을 누릴 수 있었으니 힘이 들었지만 그런 대로 행복한 마음으로 달릴 수 있었다.
서울은 참 멀고도 먼 곳이었다.
내가 와 있는 섬에서는 세 시간 넘게 배를 타고 나가서 다시 여섯 시간이나 버스를 타고서야 닿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시골에서 주로 산 나에게 서울의 웅장함이나 화려함은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낯설고 멀게 느껴졌다.
금요일 저녁에 뭍으로 나와서 토요일 낮에 클럽의 달리기 코스인 법원 앞에서 출발한 버스는 저녁 무렵이 훨씬 지나서야 서울에 도착을 하였다. 올림픽 공원 부근에 숙소를 정하고 몽촌토성 주변 길을 산책하는데 싸늘한 밤바람에 목을 움츠려 들었다. 한가롭게 성 둘레를 도는 사람들과 섞여서 가파른 언덕과 돌계단을 오르는데 왼쪽 무릎이 시큰거렸다. 왼쪽 어깨 통증에 무릎 통증까지 겹치니 달릴 걱정에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다.
엷은 새벽 안개가 가득한 도심을 이리저리 돌아서 광화문에 도착을 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찬 기운이 몸을 덮친다. 잔뜩 움츠려 주변을 둘러보니 이른 시간인데도 사람들이 제법 눈에 많이 뛴다. 한결같이 자신만만해 보이는 표정들이다. 입고 있던 겉옷을 차안에 벗어두고 출발 장소로 가니 겨드랑이 사이로 파고드는 바람에 온 몸이 굳어지는 듯하였다. 출발 장소에 가서는 비닐 봉투를 구하지 못해서 남이 버린 터진 봉투로 몸을 대충 감싸고 있다가 사람의 물결에 휩싸여서 광화문을 빠져 나왔다. 출발을 앞두고 긴장 때문에 소변이 자주 마려워서 짧은 시간 동안에 화장실을 세 번이나 들락거리다보니 그 많은 주자들의 후미에 서서 출발을 하였다.
혹시 무리를 하다가는 중간에 그만 두어야 할는지도 모르니 초반에는 느리게 뛰기로 했다. 늘 적어두고 참고로 하면서 달리던 페이스 차트도 준비를 하지 않았다. 연습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런 것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난 뒤에는 그냥 편하게 달리기로 했다. 함성과 열기 속에 추위도 잊어버리고 달리기 시작했는데 5킬로미터 중간 반환점을 잘못 알고 미리 시계를 눌러 랩 타임을 쟀다가 다시 고쳐서 누른다는 것이 시계를 잘못 눌러서 시간을 체크하는데 실패를 하여서 그냥 시각을 알 수 있도록 전환을 하여 달렸는데 얼마쯤 시간이 걸렸는지는 대충 머리 속에서 계산을 할 수밖에 없었다. 10 킬로미터 지점을 조금 지나자 빗방울이 뿌리기 시작하더니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고 길바닥에 고인 물에 신발이 젖어 질퍽거리기 시작했다. 오른쪽 발에 물집이 잡히는 듯 하였고 이내 허벅다리로 통증이 퍼져 올라오는 듯 하였다.
빗속을 어딘지도 모르고 앞만 보고 달렸다. 하프 지점이라는 잠실대교를 건너고 다시 30킬로 지점을 지나면서도 불안감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어깨와 허벅지의 통증은 심해졌지만 여전히 앞만 보고 달리면서 서울 한복판을 달리는 일을 기념으로 남기고 싶어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만 보이면 옆으로 빠져나와 포즈를 취하면서 달렸다.
35킬로 지점에서는 뛰어난 마스터즈 마라토너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여자 달림이를 추월할 수 있었다. 언뜻 보면 나이보다 앳되어 보이고 가날프게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나보다 서너 살이나 연배이고 대회 참가 경력도 많아 최고 기록도 훨씬 뛰어난 분이라서 함께 참가한 제천과 경주 대회에서 모두 추월을 당했기 때문에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대회에 참가하는 각오를 밝힐 때, 몸 상태도 그렇고 연습도 부족하여 자신이 없으니 어느 정도로 달릴지 목표 기록은 못 정했지만 아무개 여성 달림이를 추월하는 것이 목표라고 우스개 소리를 했는데 마침내 그 분을 만나게 되었는데 날씨 탓인지 힘들어 보이고 많이 지쳐 있는 듯하였다.
시간을 정확하게 재지는 못하였지만 달리면서 시계를 보니, 부상에서 회복되어 여름 훈련을 제대로 하면 올해 가을쯤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던 200분대 이내에 달릴 수도 있을 것이라는 자신이 생겼지만 한편으로는 어느 순간에 닥칠지도 모르는 마라톤 벽에 대한 두려움도 가시지 않았다. 초반에 조금 느리게 달려서 그런지 생각보다 숨이 덜 차고 꾸준하게 한 사람씩 제치면서 달릴 수 있었다. 비를 맞아 추위에 떨면서도 런 하이를 느꼈다. 마침내 잠실 주경기장이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 남은 힘을 쏟아 달리고 있는데 입구에서 동서를 기다리던 처제가 “형부, 힘!” 하면서 고함을 지르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기념 사진을 제대로 남기려고 속도를 조금 늦추어 한쪽으로 비켜서 골인 지점을 통과하며 전광판의 시계를 보니 3시간 26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출발을 제법 늦게 했으니 내 최고 기록은 당긴 것 같았고........ 비에 젖은 몸이 뻣뻣하게 굳었지만 차에 옷을 두었기 때문에 어디가 어딘지 몰라서 헤매고 다니다가 칩을 풀려고 하니 손이 얼어서 운동화 끈을 풀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옆을 지나가는 다른 분에게 부탁을 하여 신발 끈을 풀어서 칩을 반납하고 기념품을 받고 나니 하도 추워서 버려진 작은 비닐 봉지를 하나 주워서 다시 다른 분에게 몸에 좀 씌워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클럽의 천막을 찾아다니며 덜덜 떨면서 이삼십 분을 헤매고 다녔다.
처음으로 서브 쓰리를 한 회원도 있었고 기록을 한껏 앞당긴 회원들이 많아서 내려오는 관광버스 안은 축제 분위기였다. 나는 정확한 기록도 모른 채 막연하게 최고 기록은 당겼다는 생각으로 오랜만에 동료회원이 권하는 맥주를 한 캔 마셨다.
서른 시간이 넘는 서울 나들이에 지친 몸으로 다리에 얼음찜질을 한다고 거실에 누워 중계방송을 했다는 방송사의 아홉시 뉴스와 스포츠 뉴스를 보고 난 뒤에 일기 예보를 보니, 동해상의 파고가 2~4미터로 매우 높게 인다고 하였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분명히 주간 예보에는 월요일에는 바다 날씨가 이상이 없다고 했는데.........
윗분의 화난 얼굴이 떠올랐다.
거실에 그냥 퍼져서 누워 있으니 피곤한데도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밤 내내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새벽에 131을 눌러서 날씨를 확인해보니 폭풍주의보는 발령 가능성이 희박해졌다고 한다. 용기를 내어서 아침 일찍 여객선 터미널에 전화를 해보니 배가 나간다고 했다.
야호 하는 환성을 지르고 싶었다. 아내가 출근을 한 뒤에 서둘러 짐을 챙겨서 부두로 나와서 배를 탔는데........
그토록 배 밑이 쿵쾅거리더니 마침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안내 방송을 하는 귀에 익은 선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해상의 기상 악화로 더 이상 운항이 불가능하므로 승객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서 도로 포항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시계를 보니 출발을 한 지 한 시간쯤 지나 있었다. 온 몸의 힘이 한꺼번에 스르르 빠져나간다. 휴대폰 통화가 가능한 위치에서 학교에 전화를 했다. 배가 돌아가므로 못 들어간다고........
집에 돌아와서는 탈진한 채 그냥 잠이 들어버렸다. 잠결에 휴대폰이 울렸다.
“못 들어왔지요? 선생님이 맡으신 특기적성반 아이들이 지금........“ 윗분의 화난 음성이 들렸다. 갑자기 아득해졌다. 이 이 순간이 그냥 꿈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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