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서울마라톤 완주기

2007. 8. 29. 09:19미련이 남아있는 마라톤 이야기/완주기(마라톤, 울트라)

쉰을 넘긴 내게 달리기란 무엇인가?


대회가 끝난 한참 뒤에 후기를 쓴다.

달리면 시간이 참 늦게 간다.
내 젊은 날은 참 빨리 지나가버렸다.

누군가 내개 왜 달리느냐고 묻는다면 "느리게 가는 시간을 느끼기 위해서' 라고 대답하련다.



눈이 감기다.

출발선에 섰는데 피곤해서 눈이 감겼다.
코끝에서 뜨거운 불이 났다.
지난 해 봄의 기록으로 B그룹 앞 번호에 배정을 받았지만 자신이 없어서 맨 뒤편에 섰다.
풀코스를 쉰 번 넘게 달렸지만 한강 주로는 처음 달려 본다.
혹서기대회로 인연을 맺은 서울마라톤 클럽에서 주최하는 대회라는 명성만 듣고 신청을 했지만 막상 출발을 앞두고 긴장 속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 속에 서 있으니,
‘이렇게 피곤한데 뛰다가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도 들었다.
여느 대회와는 달리 소음 때문인지 출발 신호를 소리로만 알리는 게 다행이었다.
무턱대고 대회 주최측이 기분을 낸다고 화약이라도 터뜨려대면 지독한 냄새 때문에 한참 동안은 숨이 막힐 것 같던데 역시 뛰는 사람 속을 알아주는가 보다.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울산에서 새벽 한 시에 출발하는 심야 마지막 고속버스는 비가 오는 밤길을 달려 강남터미널에 다섯 시 반이 넘어서야 도착하였다. 흥분한 탓인지 잠이 오지 않았고 세월을 건너 뛰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25년 전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식사를 마치고 헤어지기 아쉽다고 자리를 옮겨간 노래방에서 아이들이 건네주는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내 심정을 노래한 듯 애절하여서 늘 즐겨 부르던 추억의 노래인,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
스물 몇 해 전에 섬에 정든 아이들을 두고 떠나올 때 생각이 나서 노래를 부르는데 목이 멘다.
“선생님 오늘 서울 가시지 않으면 안 되시나요?”
“저희들과 그냥 여기서 눌러 앉으시지요?”
양 팔을 잡고 눌러 앉히려는 아이들과 헤어지는 아쉬움이야 크지만 미리 카운터에 배낭을 맡겨두었다가 아이들 몰래 살짝 노래방을 빠져나왔다.
강남고속터미널 부근은 몇 번이나 새벽에 도착하여 지리가 조금은 익숙해진 곳이지만 눈앞에 아파트만 잔뜩 버티고 있는 동네에서 잠깐이라도 쉴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서울은 여전히 낯선 곳이다.


스무 세 해만의 만남

25년 전에 경상남도 남해의 서쪽 바닷가에 있는 작은 중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학교 근처 언덕에 자생하던 치자 꽃처럼 순박한 아이들과 두 해를 함께 지내다가 울산을 거쳐서 다시 고향인 경북으로 옮겨 왔는데 첫 발령지라서 그런지 늘 아이들을 잊지 않고 지냈다.
첫 해에 1학년 담임을 했는데, 우리반이던 아이 하나가 어떻게 알았는지 옮겨가는 학교마다 스승의 날과 성탄절에 축하 카드를 보내주었다.
심성이 착하고 글을 쓰는 취미가 있던 아이에게, 문학가가 되라는 격려와 함께 필기구를 하나 사 주는 것으로 이별의 정을 대신했었는데, 벌써 잊어버린 것을 아이는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 경운기 사고로 아버지를 일찍 여위고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우수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정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산업체 부설 야간 학교에 진학을 했는데, 공부를 더 하고 싶은 마음에 어렵고 힘들게 혼자 힘으로 대학에 진학을 한 의지가 강한 아이였다.
고맙게도 가끔씩 서울 근처에 사는 몇몇 아이들의 안부를 전해 주었는데 올 해 초에는 자기 동창들이 졸업한 지 22년 만에 모임을 만들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 일을 계기로 해서 아이들이 여럿 연락을 해왔는데 3월 3일 날 울산에 있는 아이들이 모인다면서 포항은 울산에 가까운 곳이니 선생님도 꼭 참석하시라고 당부를 해왔다. 자기들끼리 연락하는 게시판에는 아예 내가 참석을 한다고 못을 박아두었다.


사흘 만에 다시 풀코스를 뛰는 것이 가능할까?

동아마라톤대회에 대비하는 마지막 장거리주로 2주간의 여유가 있는 서울마라톤대회에 일찌감치 참가 신청을 해두었는데, 고성마라톤대회에 함께 참가했던 ‘창포마을 달림이’의 영곤 아우가 3.1절 기념 광주마라톤대회에 함께 가자고 하는 바람에 그 대회도 참가 신청을 했다.
지난해에도 광주 대회에 신청을 해두었다가 눈이 많이 온다는 기상예보에 놀라서, 개학일과 입학식에 맞춰서 미리 울진으로 올라오는 바람에 참가를 하지 못했기에 올해는 꼭 한 번 가보고 싶어서 광주대회에 다녀왔다.
사흘 뒤에 다시 뛸 것을 염두에 두고 페이스를 조금 늦추었는데도 뛰고나서 뭉친 다리가 쉽게 풀리지 않아 불안했고, 개학하자마자 첫날부터 부장들 모임이 있어서 마지못해 참가를 했는데, 고참부장이라고 쉽게 자리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눈치를 보고 있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사택에 와서 짐 정리를 한다고 새벽까지 미련을 떨다보니 잠을 설쳐버렸다.
토요일 오후에 포항으로 내려오면서 같은 방향으로 가는 기숙사 아이 하나를 데려다 주기로 했는데, 운전하는 도중에 얼마나 잠이 오는지 뒷자리에 앉아서 꼬박 졸아대는 아이 몰래 허벅지를 꼬집으면서 내려오다가 쏟아지는 잠을 더는 못 참겠기에 갓길에 차를 세워두고 잠시 눈을 부치다가 다시 운전을 했다.



이제는 어엿한 중년의 아저씨, 아주머니로 변한 아이들

집에 들러서 달리기에 필요한 준비물만 챙긴 뒤에, 울산에 갔다가 밤차로 달리러 서울에 간다고 하니 집사람의 눈길이 곱지가 않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중독 단계인데.
주말이라서 그런지 차가 붐비었고 모임 약속 시간이 지나자 마음이 초조해졌다. 약속 장소인 일식집에 도착하니 울산 근처에 거주하는 제자들은 물론이고 거제와 부산 등지에서 온 아이들이 열 명 정도 모여 있었는데 얼굴을 쉽게 알아 볼 수 있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우리 반이 아니어서인지 도무지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이들도 두 명이나 있었다. 일단 솔직하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고백을 했다.
세월이 한참 흘러 기억이 선뜻 나지 않는데 굳이 가식적으로 대할 일이 없지 않는가?
그러나 잠깐이었다. 이내 아이들의 이야기 속에 지난 추억들이 쏟아져 나왔고 필름을 거꾸로 돌리듯 지난 일들이 하나씩 생각나면서 어린 아이들의 얼굴이 중년의 얼굴에 오버 랩 되었다.


술 한 잔들 하시게

아이들(이제는 마흔을 바라보는 중년이지만 나는 아직도 이렇게 부른다)이 반갑다고 주는 술잔을 사양하고 정을 물로 대신 받았는데, 그냥 있기가 미안해서 한 사람씩 차례로 곁에 다가앉아 술을 한 잔씩 권했다. 아이들은 주로 지난 시절에 내가 깐깐하고 무서운 선생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척 고마워했고 반가워했다. 내가 잘 한 것은 없지만 아이들 자신들이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착했다. 내 앞 머리카락이 바람에 다 날아가 버렸다고 안타까워하는 여자애도 있었다. 억척스런 남해 사람들답게 먼 객지에서 살지만 모두 다 부지런하니 잘 사는 것 같아서 마음이 든든했다.
먹음직스런 회가 나오고 온갖 반찬이 나왔는데 밥이 눈에 띄지 않았다.


촌놈, 한강변을 달리다

한강변을 달린다기에 나는 뭐 쭉 뻗은 강변로를 달리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길이 좁고 꼬불꼬불하였다. 한강에서 열리는 대회에 처음 참가하였기에 기대를 잔뜩 했는데 생각보다 코스가 좁고 시멘트 바닥도 있어서 출발해서부터 불안감이 컸다. 게다가 비까지 구질거리고 내렸다. 빠르게 달릴 엄두를 내지 못하겠기에, 카드사 유니폼을 입은 작고 마른 사람과 체중이 좀 나가는 사람이 함께 달리는 뒤를 따라 달렸다. 생각보다 몸은 무겁지 않아서 초반 5킬로를 27분 정도의 속도로 달렸다. 10킬로 표지판을 지나서 한참을 달리는데 흰머리를 휘날리며 같은 클럽 소속의 여자회원과 달리시는 노인 한 분이 나를 스쳐 지나간다. 나이가 적게 보아도 일흔이 훨씬 넘으신 듯하다. 곁에서 같이 달리는 여자 분과 함께 웃으며 주변 사람들과 큰 소리로 인사를 나누며 기운차게 달리셨다.
나는 잘 모르지만 이미 달림이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분이신 모양이다.


배가 고프다

뭔가 착각을 해도 단단히 한 셈이다.
한여름에 과천대공원에서 열리고 주로 임도를 순환하는 코스인 혹서기대회를 두 번 참가했던 나는 서울마라톤클럽에서 주최하는 대회는 다 혹서기대회처럼 먹을 것이 넘치는 줄 알고, 준비해갔던 파워 젤도 가방에 넣어둔 채 배낭을 맡겨버렸는데 한참을 가도 먹을 것이 보이지 않았다. 어제 저녁부터 생선회만 실컷 먹었지 밥 구경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새벽에 목욕탕에서 깜박 조는 바람에 시간에 쫓겨 아침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으니, 염려했던 다리 근육의 통증보다 배고픈 것이 더 문제였다. 속이 든든해도 달릴까 말까할 지경인데 배가 고프니 죽을 맛이었다. 빗속을 달리는 동안 온몸의 기운이 쏘옥 빠져 나갔다. 이러다가 고생을 엄청나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주라도 하자

사람들이 앞서간다.
나보다 더 나이가 많은 사람, 더 몸이 무거워 보이는 사람, 달리기 경력이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여자 참가자들이 모두 나를 추월해 간다. 힘차게 달려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파워 젤을 챙기지 못한 것을 수도 없이 후회했다.
출발을 뒤에서 하고 초반에 천천히 달리는 나는 대부분의 대회에서 후반부에, 나보다 먼저 출발을 했으나 초반에 무리를 해서 지친 많은 사람들을 헤치면서 힘차게 달리는데 그런 때의 으쓱하던 기분 대신에 오늘은 거꾸로 추월당하는 비참함을 맛보고 있으니 힘이 더 빠지는 것 같았다.
마라톤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사흘 만에 다시 풀코스에 도전을 하면서 어차피 잘 달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발을 하면서는, 사흘 전에 한낮의 기온이 제법 올라갔던 광주에서 슬슬 달려도 3시간 30분대 초반에 들어갔으니 쥐만 나지 않으면 4시간 정도로야 느긋하게 달릴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이제는 기록이 문제가 아니라 완주를 하느냐가 더 문제였다.
몸이 지쳤다는 증거가 곳곳에서 드러났다.
컨디션이 좋을 때는 다음 거리 표지판이 얼마 달리지 않으면 보이지만, 힘이 들 때는 한참을 가도 보이지 않는데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1킬로 1킬로가 왜 이리 멀게 느껴지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비를 맞은 어깨가 굳어졌고 허벅지 뒷부분이 은근히 당기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김밥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운동을 하고 난 뒤에 회복이 더딘데다가 자주 대회에 참가하니 몸이 회복될 겨를이 없지만, 연습은 충분하게 못하더라도 초반에 욕심을 내지 않으면 후반까지 편하게 달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름대로 후반에 쓸 힘을 비축하는 방법을 최근에서야 깨닫고 몇 번 실천하고 경험하게 되었다.
바로 떡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포항이나 울진시장 안의 떡집에 단골이 되었다.
먹을 것이 많이 부족하던 어린 시절, 논농사를 짓고 나서 추수철인 가을에 ‘골 메운다.’고 집에서 찹쌀버무리를 가끔 해먹었는데 ‘도대체 고된 농사일에 지친 몸에 무슨 수가 생긴다고 떡 쪼가리 몇 개 집어 먹으며 골을 메운다고 하는가?’ 하고 의심스러워했는데 그 말이 달리기를 하면서야 이해가 되었다.
몇 년 전에 단체로 대회에 참가할 때, 대절해간 버스를 함께 타고 가면서 주관을 하던 사람들이 준비한 약밥과 떡을 실컷 먹으면서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대회에서는 후반만 되면 퍼지던 그 때까지의 다른 대회와는 달리 제법 좋은 기록으로 결승선까지 힘차게 뛸 수 있었다.
멋모르고 마라톤을 시작하면서 읽은 글귀 중에, 체중을 1킬로만 줄이면 풀코스 기록을 3분은 당길 수 있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고 대회 전날까지도 체중 줄이기에 몰두하느라 굶다시피 하고 대회에 참가를 하던 완전 초보 시절에는 하프를 뛰다가도 후반에 퍼졌는데, 우연한 기회에 좋은 경험을 한 셈이었고, 그 후로는 되도록 달리러 가기 이틀 전부터는 떡을 구해서 넉넉하게 먹어 두는 방법을 나름대로 늘 고수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영 아니올시다.’ 이니 불안감이 더 컸다.
힘이 들고 지치니 반환점을 돌면서 여기가 결승지점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보다 정신이 먼저 약해진 것이다.
가야할 길이 천리인데 힘은 다 빠져 나가고 다리는 천근만근이었다.
그래도 쉰 번을 넘게 대한민국에서 험하다는 풀코스를 가리지 않고 찾아가서 달린 경험이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대회에 참가한 복장을 보니, 비가 오고 기온이 낮은 날씨탓인지 마라톤복을 제대로 챙겨 입은 사람들이 드물어서, 복장을 갖추어 뛰는 내가 이 많은 사람들 중에 풀코스 참가 경력으로 치자면 한참 고수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수는 힘이 들어도 버티어내야만 진정한 고수가 아닐까 하는 자아도취에 빠져 어쨌든 한걸음이라도 줄여나가자는 생각으로 천천히 달렸다.
27킬로 지점에선가 얻어먹은 김밥은 평생 그 맛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속을 많이 넣어서 색이 화려한 것도 아니고 그냥 밥을 김 조각에 싸서 주는 것이었는데도 한마디로 꿀맛이었다. 오랜 봉사에서 얻으신 노하우인지 물이 없어도 김밥이 목에 걸리지 않고 먹기에 참 편했다. 수많은 달림이들을 위해 잽싸게 김밥을 싸서 내밀던 누님 같은 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하면서 부끄럽고 염치없었지만 아예 붙어 서서 몇 개를 더 얻어먹었다.
먹을거리가 넘치는 요즘이지만 10여 년 만에 맛보는 소중한 음식 경험이었다.
10여 년 전 봄에 경북교원사진연구회 팀들과 소백산에 철쭉사진을 찍으러 갔을 때도 지독한 배고픔을 한 번 겪었다.
전날 숙소 근처인 단양 강변의 포장마차에서 거의 밤을 세우다시피하며 오랜만에 만난 선후배들과 어울려서 술을 마시고 사진에 대한 이야기로 열을 올리다가 늦게 숙소로 돌아와 늦잠을 자는 바람에 아침밥을 제대로 챙겨 먹지도 못하고 이동을 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내 장비가 무겁다고 점심도시락을 대신 들고 가준다던 선배가 산에서 갑작스럽게 장대비를 만나 먼저 하산을 하는 바람에 혼자 멋모르고 국망봉 쪽으로 이동하던 나는 일행을 놓치고 먹을 것이 없어 비를 맞고 쫄쫄 굶으며 산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갑자기 내린 비로 모두 하산하여 사람 흔적이 없었고, 길가에 남들이 버리고 간 과일 껍질 등을 주워 먹으며 하산을 했는데 좀 두꺼운 과일 껍질을 만나면 어찌 그리 반갑던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고맙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이후로는 돈을 주고 사 먹는 어떤 음식이든지 비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정도로 단단히 고생을 했는데 오늘도 그 때 이후로 처음 겪는 배고픔이었다.
김밥을 몇 개나 먹고 나니 기운이 조금 났다. 밥의 기운보다는 몇 시간을 서서 쉴 틈 없이 김밥을 사면서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웃으며 봉사하던 나이 지긋한 누님 같은 분에게 느낀 고마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32킬로쯤에서 또 한 번 먹을거리를 제법 챙겨 먹었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인데도 언짢은 내색 없이 기다리고 있다가 배고픔을 면하게 해주었으니 눈물이 날만큼 고마웠다.


가난이라는 괴물

배고픈 것이 해소되니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비가 내린 탓인지 흙탕물이 진 한강을 내려다보니 송강호가 주연을 한 괴물이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촌놈답게 한강변을 달리면서 두리번거리며, 영화를 촬영한 곳은 어디쯤일까, 티브이에서 본, 집값이 우리 집의 열 배 스무 배쯤이나 비싸다는 아파트가 저곳일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했지만, 가족을 위협하는 세상이라는 괴물에 맞서 절규하듯이 연기하던 송강호의 눈빛보다 한 사람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세상을 사는 동안에 그 이름만 떠올려도 눈물이 먼저 고이는 이름,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맞서 싸울 괴물이 있었다면 그것은 분명 가난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에 누구나 그러했듯이 열심히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 때문에 어린 자식들을 먹이고 가르치신다고 발버둥 치듯이 세상을 사셨고, 겨우 가난에서 벗어날 즈음에는 편안함 한 번 제대로 누리지 못 하시고 세상을 떠나셨으니 내게는 늘 여한이었다.


슬픈 기억

김밥으로 배를 채우고 나니 63빌딩이 보였다.
10여 년 전에 아버지 칠순을 맞아서 가족이 서울 나들이를 한 적이 있다.
마침 아버지 생신이 여름방학 때여서 온가족이 서울 누이네 집에 다니러 갔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하시던 아버지를 모시고 에버랜드에 가서 휠체어를 이용하여 곳곳을 구경시켜드렸고, 어린 자식들과 조카들이, 지팡이에 의지하여 거우 걸음을 떼시던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63 빌딩의 전망대와 수족관도 함께 구경하였다.
모처럼 서울에 온 김에 더운 날씨인데도 강행군하듯이 여러 곳을 다니며 서울에 머물던 어느 날 저녁엔가 여동생과 매제가 부모님께 맛있는 음식을 대접한다고 수락산 자락에 있는 어느 음식점에 모시고 갔는데 소고기 육회가 나오는 고급음식점이었다. 그날 아버지께서는 육회를 참 맛있게 많이 드셨다.
평생 동안 거친 음식만 드시고 살아오셨는데, 진작 그런 곳에 한 번 모시지 못한 불효 때문에 음식을 맛있게 드시는 것을 보고 속으로 무척 송구스러웠다.
문제는 그날 저녁에 생겼다.
아버지께서 맛난 음식을 보고 좀 많이 드셨는지 탈이 나셔서 밤 새 고생을 하셨다.
서울에 다녀오신 이후로 자리에서 일어나시지 못한 채 고생하시다가 그 해 겨울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 때 서울나들이가 우리 가족이 함께 한 유일한 장거리 여행이었으니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지금도 가끔 그 때 생각이 난다.
그날 맛있는 음식을 급하게 드시던 아버지.......
그런 변변한 자리에 제대로 한 번도 모시지 못한 부끄러움과 슬픔은 세월이 지나도 가시지 않는다.


만나고 또 만나는 것이

한참을 앞서 가신 줄 알았는데 흰머리 날리시던 어른이 바로 앞에서 힘겹게 달리고 계셨다. 구부정한 등과 축 쳐진 어깨가 측은하기 보다는 저 연세에도 저렇게라도 달릴 수 있는 건강이, 달리시려는 용기가 새삼 부러울 뿐이었다.
아버지께서는 회갑을 넘기시고 불과 두어 해 지난 뒤에 당하신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여생의 몇 해를 거동조차 제대로 못하시는 불편을 겪으시다가 돌아가셨다.
그래서 지금도 건강한 젊은이가 부럽지만, 나는 건강한 노인들이 더 부럽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버지께서는 한 번도 양복을 입으시지 못하셨다.
집에 있는 친척들의 결혼사진에조차 혼자 점퍼를 입고 한쪽 구석에 서 계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어릴 때부터 내 머릿속에 남아 있어서, 대단한 효자는 아니었지만, 고등학교 3학년 때 예비고사를 치고 난 뒤에 아랫동네의 부잣집 아이들을 몇 명 가르쳐서 받은 돈을 모아서 양복을 한 벌 해드렸다.
대학 본고사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내가 번 돈으로 처음으로 아버지께 양복을 한 벌 해드리고 나니 세상을 얻은 듯 했다.
올해 대학에 들어간 둘째 아이가 며칠 전에 선물이라면서 백화점 포장지에 싸인 큰 꾸러미를 하나 내밀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직장 때문에 늘 떠돌아다닌다고 뒷바라지도 제대로 못해줬고,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제가 원하는 대학에 보내지도 못했고, 더군다나 졸업선물도 하나 변변하게 사주지 못해서 미안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이웃의 아는 아이에게 한 달 동안 수학을 가르쳐 주고 사례로 받은 얼마되지 않는 돈을 아껴서 산 것이라고 하니 선물을 받고나서 옛날 생각이 났다. 양복을 입으시니 훤해보이시던 아버지를 바라보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한참 흘렀나보다.
주고받는 처지만 바뀌었을 뿐이지만 자기 자신보다 부모를 먼저 생각해주는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서 미안하기조차 했다.
인생도 강물과 같아서 저 한강물처럼 원하던 원하지 않던 끊임없이 이어지며 흘러가고 삶의 어느 기점에선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다시 만나게 되는가 보다.
한강이 있는 한 여전히 강물은 흘러가겠지만 강은 여전히 강으로 남아 있으리라.

뒤에서 갑자기 획 앞질러가는 것이 미안해서 옆에서 천천히 얼마간을 같이 달리다가 앞서나갔다.
자식뻘이나 되는 내가 잠시 그 어른을 앞질렀지만 그 어르신은 인생의 승자다.


아직은 먼 길

63 빌딩이 보이기에 골인지점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엔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힘이 들 때는 비슷한 사람끼리 의지하면서 함께 달리면 훨씬 수월하니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와 눈인사를 나누고 함께 달렸다. 비에 젖고 땀에 절어 얼굴을 찡그리다가도 곁에 사람이 다가서면 얼굴을 펴고 웃으며 함께 달렸다. 순위에 상관없이 같이 달리니 마라톤 주로에서 함께 달리는 모두가 다 동료다. 요란한 소리를 내지르며 전철이 달리는 철교 밑을 지나고, 또 거대한 다리 밑을 지나기를 여러 차례하고 나서야 다시 63 빌딩이 보였다.
다리 교각 밑을 지날 때마다 저 어느 곳에서 또 다른 괴물이 나올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마주칠 괴물은 내 안에 먼저 들어와 있는지도 모른다.
절제하지 않는 생활.
좀처럼 타협하지 않으려는 굳어버린 인식.


걷지 않고 완주하다

37킬로를 지나니 내 몸 어디에 그런 힘이 남아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갑자기 힘이 났다.
‘그래 이렇게 가면 또 한 번 어려움을 이겨내고 완주를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한 발 한 발 앞으로 달려나갔다. 걷지 않고 달릴 수 있으니 그저 고마웠다. 시계를 보니 잘만하면 4시간 안에 골인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야, 넌 대단하다.
올해는 그래도 한 번도 걷지 않고 다 뛰어서 완주하는구나,
그것도 사흘 만에 다시 풀코스를 뛰면서 4시간 안에 달릴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대단하다.
그래 넌 고수다......‘

결승점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곳을 지나갈 때 길가에서 응원을 하던 나이 든 한 분이,
“대단하십니다.” 하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려주었다.
4시간 가까이 되어서 들어오는 주자에게 보내는 격려치고는 너무 멋진 찬사였고, 걷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끝까지 달려서 완주를 하여 스스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여서 찡그리던 얼굴을 활짝 펴고 웃으며 고맙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렇구나, 또 한 번 대단한 일을 해냈구나.


여전한 고마움

재작년엔가 지역에서 철인경기를 할 때 자전거 바꿈터 근처에서 자원봉사를 한 적이 있다. 사고의 위험을 의식하며 팽팽하게 긴장해서 서 있는 일이 솔직히 달리는 것보다 몇 배나 더 힘이 들었다.
서울마라톤대회에서는 가족단위로 봉사를 하는 분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비를 맞고 서서 물이 든 컵을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이 건네주려는 어린 손길이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이런 고마운 배려 덕분에 힘을 얻어서 완주하였으니 고맙다는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이 대회가 열린 10년 동안을 빠지지 않고 참가하여 달린 사람도 있겠지만,
10년 동안 빠지지 않고 봉사를 한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의 희생이야말로 정말 대단하고 대단한 일이다.


숙제를 하다

꼭 한 번은 참가하고 싶었지만 동아마라톤대회와 1주일 간격으로 열리는 바람에 컨디션 조절 문제로 참가할 기회를 얻지 못해 아쉬웠던 서울마라톤대회에 참가하여 힘들었지만 무사히 완주를 했다. 내친 김에 혹서기대회는 물론이고 올 가을에는 기회가 된다면 서울울트라마라톤에 다시 한 번 참가하고 싶다.
곳곳에 자주 달리러 가다보니 이제 내게는 기념품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지쳐서 들어오는 사람을 따뜻하게 수건으로 감싸주는 정은 소중하다.
이제 마라톤대회에 참가하는 것은 고마운 사람들을 만나고,
달리면서 묵상을 하듯이 내 삶을 돌아보는 값진 여행일 뿐이다.

앞으로는 나도 가끔씩은 내가 받은 정을 남에게 베풀며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