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곶울트라 완주기
2007. 8. 29. 09:14ㆍ미련이 남아있는 마라톤 이야기/완주기(마라톤, 울트라)
고마운 사람들(호미곶울트라마라톤완주기)
<호미곶 울트라마라톤 참가기>
신청을 해두고도 고민이 많았다.
처음 먼 길을 달리는 일이라서 과연 해낼 수 있을 것인가하는 걱정과 5월 하순의 바다 날씨도 가끔씩 심술을 부리니 나갈 수 있을까 하고 걱정도 되었는데 주간 일기예보에 나온 날씨가 불안하여 마지막까지 속을 좀 태웠다.
특히 사흘을 남겨두고는 16일날의 바다 날씨가 나쁜 것으로 나와서 또 신청해두고 못나갔던 지난 해 호미곶의 악몽이 되살아나는가 싶기도 했고 징크스가 될까봐 염려를 하면서 미리 전화를 해서 17일날에 나갈 수 있다면 포항에 도착을 하여 바로 호미곶으로 가더라도 한 시간 정도 뒤에 출발을 할 수 있으니 첫 번째 체크 포인트의 제한 시간만이라도 완화해 달라고 할까하는 생각도 해봤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16일날 배가 들어와서 나갈 수 있었고 다음날에는 무사히 출발선에 설 수 있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참가기를 쓸 때쯤에는 고통이든 희열이든 이미 잊혀져 가는 시점일 것이다.
나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미 잊어버렸거나 흐릿한 기억을 되살린다기 보다는 꼭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은 분들에 대한 예의로 이 글을 시작한다.
우리 포마클의 정수영 회장님, 박영인사무국장님, 안천수 훈련부장님, 김도기님, 김선경선생님, 김영근님,.........
그리고 함께 달리기의 즐거움을 누리는 동서들, 처제들..........
그리고 직장 때문에 섬에 혼자 떨어져 있는 나를 이해해주는 가족들.
잠을 참으며 웃는 낯으로 힘을 주시고 친절하게 봉사를 해주신 오천마라톤클럽과 그린넷마의 여러분들.
고마운 분들이 너무 많다. 달리는 동안에 내가 완주가 가능하다면 바로 이런 고마운 분들의 도움 덕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코스를 먼저 달려보신 지천명 최성열님과 클럽의 김도기님의 귀한 충고와 도움에는 이 자리를 빌어 특별히 감사를 표한다. 최성열님의 글을 읽고 결심을 다졌고 김도기님은 초반에는 무조건 천천히 달리라는 충고의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는데 과연 금과옥조로 삼을 경험에서 우러나온 귀한 충고였다.
완주는 하였지만 기록이 저조한 것은, 대회 사흘 전부터 겹친 각종 체육 행사와 시카고에서 오신 누님 내외를 안내한다고 시간을 내느라 잠이 부족하였던 것과 마지막 마무리 장거리주 점검을 너무 멀리하였고 오르막내리막 길을 힘들게 달린 탓에다가 이틀 전에 울릉군민체전에 참가하여 20키로 정도를 달린 것까지 모두 지나치게 무리를 하였기 때문에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다.
그러나 완주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으므로 이 장거리 점검주가 무익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지만 피로가 쌓여서 달리는 날은 낮에도 눈이 감길 지경이어서 손님들이 집에 있어도 할 수 없이 아들 녀석의 방에 혼자 들어가서 잠을 좀 자두려고 누워 봤지만 머릿속이 어지러운지 잠은 잘 수가 없었다.
무리한 연습을 한 까닭으로 허벅지 뒤쪽의 햄스트링이 굳어서 당기고 장딴지에 통증이 남아 있었다. '이런 몸 상태로 달릴 수 있을까' 아니 '달려야 하는가' 하고 심각하게 고민을 하다가 이왕 달리려고 신청을 했고 최고 기록에 도전을 하는 것도 아니니 한 번 부딪혀보자는 쪽으로 마음을 굳히고 급하게 스포츠마사지를 한 번 받은 뒤에 참가하기로 결정을 했다.
언젠가 울트라에 도전을 할 때 메고 달리려고 지난 해 사 둔 울트라용 8리터 짜리 도이터 배낭은 이미 몇 번 둘러메고 달려서 몸에 익어 있었는데 가볍고 몸에 착 달라붙어서 편리하고 좋아서 잘 샀다는 생각을 몇 번이고 했고 다른 분들에게 권하기도 한다.
헤드 랜턴은 이전에 등산용으로 산 것이 두 개나 있는데 달릴 때 지니기에는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가지고 갔으나 그냥 두고 달렸고 연양갱, 쵸코바, 에너지젤 등의 먹을 것을 두루 준비를 하였으나 주로에서 공급하는 음식료가 충분하여서 굳이 지닐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나중에 진전고개에서 짐을 던다고 김도기님께 모두 맡겼다. 그러나 80킬로쯤에서는 배가 고프기도 하여서 두어 개는 남겨 둘걸 하고 후회를 하기도 했다. 중간 물품 교환 지점에 미리 보내 두었다가 찾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체온의 유지를 위한 가벼운 점퍼류는 경우에 따라 꼭 필요하므로 반드시 하나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내 경우에는 이런 옷을 미리 준비한 것이 천만다행이었기 때문이다.
이 코스를 경험하신 분들의 충고대로 진전고개까지는 무조건 천천히 달렸다.
가능하다면 비슷한 수준의 다른 이들과 같이 달리려고 했는데 우리 포항마라톤클럽의 참가자들은 전부 고수들이라서 출발을 하기 전에 잠깐 얼굴을 본 것을 제외하고는 뵙지 못했다. 그래서 출발하여 달리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파트너를 물색을 했다.
초반에는 울산에서 오신 분과 연일에서 개업약사로 일하시는 두 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달렸다. 이분들도 처음 참가를 하고 대략 14시간 정도의 기록을 목표로 한다는 말을 듣고는 내심 파트너로 점을 찍었고 착 달라붙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뛰었다.
노을이 지는 구만리를 지나서 멀리 포항의 북부 해안이 보이는 해안선을 끼고 달리는 길고 긴 오르막내리막 길이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그리 부담이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호미곶 마라톤 코스의 일부 구간인 도구까지 나오는 동안에는 걷지는 않았다.
울산에서 오셨다는 외환은행에 근무하는 박영철님과 포항시약사회 소속의 이택관님(이분과는 춘천마라톤에 참가를 하여 주로에서 인사를 한 탓에 서로 반갑게 만났음)인데 꾸준하게 1키로당 6분 30초 정도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달릴 수 있어서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처음부터 일정한 페이스로 느리게 달렸기 때문에 더 이상 추월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달려가는 것이 보였지만 뒤에서 달리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
느리게 다른 이들과 어울려서 달리니 몸의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카시아꽃 향기가 짙은 어둠 속을 밤에 달리는 일을 처음 겪어보는 탓인지 가벼운 흥분으로 들뜬 탓인지 앞으로 닥칠 상황이 두려웠지만 처음의 걱정보다는 허벅지와 장딴지의 상태가 나았기 때문에 기분은 상쾌했다. 어두운 주로를 달리는데 헤드 랜턴을 준비하지 않아서 걱정이 되었는데 함께 달리는 두 분이 모두 헤드 랜턴을 장착하여서 도움을 받았다.
눈앞에 깜박이다가 사라지는 반딧불이처럼 앞서서 달리는 이들의 안전등이 이따금 반짝거리니 나중에 어둠 속에 혼자 남겨질 일이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오천을 지날 무렵에는 달이 올라오기 시작하여 말 그대로 월광소나타였기 때문에 이 걱정은 한갓 기우였지만 만약 어두웠다면 가벼운 페츨 티카 종류의 헤드 랜턴은 반드시 준비를 하여야하겠다는 것을 느꼈다.
시카고 누님 내외와 포항 큰 누님을 비롯한 친척들이 한꺼번에 구룡포에 살고 계시는 이종사촌 누님댁으로 이동을 하는 일정에 맞춰서 이동을 한다고 머뭇거리다가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집을 나섰기 때문에 출발하기 전에 배가 약간 고픈 상태였다. 그래서 첫 음료 공급처인 19킬로 지점에서 물과 간식을 넉넉하게 먹었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주로에서 봉사를 하는 분들의 반가움 외침은 큰 힘이 되었다.
나는 이곳의 지리에 훤하니 별 문제가 없지만 먼 곳에서 오신 분들에게는 자원봉사를 하는 분들의 친절한 길 안내가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긴 거리를 달리면서도 갈림길의 주로 안내와 주로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분들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서 달리는 내내 과연 그린넷마답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고 우리 클럽이 다음에 이런 행사를 주최한다면 회원 모두가 열 일을 제쳐두고 완벽한 대회진행을 위하여 봉사를 하여야 할 것임을 깨달았다.
청림 4거리를 지나서 오천읍내 외곽도로 쪽으로 접어들어서는 함께 달리던 두 분이 먼저 치고 나가 버렸다. 25킬로 정도를 달려오면서 이미 지치기 시작하여 함께 달리면서도 말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침묵 속에서 함께 달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혼자 달리는 것이 더 났다는 생각을 할 무렵이어서 덜 섭섭했다.
어쨌든 진전고개까지는 천천히 달려야겠다는 결심을 한 번 더 확인을 하면서 달렸다.
출발 전에 잠깐 뵈었던 김선경선생님께서 차를 타고 이동을 하면서 곳곳에서 멈추어서 소리를 질러 격려를 해주셨다.
첫 번째 체크 포인트인 용산주유소에서 김영근님이 기다리시다가 격려를 해주셨다.
김도기님께서 이것저것 챙겨 주셨고 배가 고파서 숭늉을 두 그릇이나 먹었다. 위에 그리 부담을 주는 음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배가 고픈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음식료를 공급하는 곳마다 물과 바나나 등을 넉넉하게 먹고 마셨는데 미리 카보로딩을 하지 못한 나로서는 잘 한 일이었던 것 같았다.
용산을 지나서 갈평으로 접어드는 길은 달빛이 교교했다.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다니는 부산이나 울산 대구 등의 외지 번호판을 단 차들 외에는 차들이 별로 보이지 않아서 야간 울트라 코스치고는 멋진 코스라는 생각을 했다.
갈평 피정의 집 근처를 지날 때는 영양본당에 나갈 때 그곳에 계시면서 우리 가족들에게 정을 듬뿍 쏟아주셨던 김한모바오로신부님이 생각이 났다. 갈평 피정의 집으로 가는 길을 물어셨던 한 순간의 기억이지만 고마운 마음을 늘 마음 속에 간직하고 살고 있으니 이렇듯 생각이 나나보다.
갈평에서 진전으로 이어지는 골짜기는 6.25 때 우리 부모님이 피난을 가셨다는 곳이다. 그 때는 난리를 피해서 숨을만큼 골짜기 중의 골짜기였다지만 이제는 길이 넓어지고 포장이 되어서 차들이 씽씽 달리는 풍광이 좋은 곳이어서 쉰을 바라보는 자식이 그 길을 달리고 있으니 세월의 흐름은 이렇듯 많은 변화를 가져오나 보다.
진전고개 꼭대기까지는 걷다가 뛰다가 하였지만 무리를 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달빛에 드러난 골짜기를 둘러보거나 계곡을 내려다보며 달렸다.
중간에 정수영회장님이 트럭을 몰고 지나가시면서 등뒤에서 파이팅을 외쳐주시고는 앞 주자들을 만나신다고 가셨다.
진전고개에서는 넉넉하게 쉬었다.
호박죽을 한 그릇 먹고 나서 물을 충분하게 마시고 바나나도 한쪽 먹었다.
입고 있던 옷이 젖어서 한기가 심하게 들어서 얇은 긴 팔 옷을 꺼내 입었다. 블랙야크 제품의 쿨맥스인 이 옷도 겨울철 대회나 이럴 때 여러 번을 참 유용하게 입었다.
김도기님께서 허벅다리 부분을 마사지 해주셨고 발목을 젖히고 돌려서 뭉친 다리 근육을 풀어 주셔서 두고두고 고맙게 생각한다.
고개마루에서 기다리시던 박영인국장님이 격려를 해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음날 본인이 평택까지 달리러 가셨다는데 참 고마운 일이다.
이경미선생님도 만났다. 대동배쯤에서 앞으로 치고 나가시던데 고개 마루에는 나보다 뒤에 도착을 하신 것 같았다.
김태현님이 뒤에 고개 마루에 도착을 하셨는데 별로 피로한 기색이 없어 보여서 남은 구간은 여유있게 달리실 것 같아 보였다.
출발을 한 지 다섯 시간쯤이 지나서 하루 날짜가 바뀌었다.
달리려고 나서는데 긴 팔 옷으로 갈아입었는데도 온 몸에 한기가 들어서 배낭 속에 준비해 간 방풍점퍼를 꺼내 입으니 좀 덜하였는데 이런 준비를 한 것이 두고두고 다행스러웠다. 하도 떨고 있으니 김태현님이 놀라시면서 그리 추우냐고 물으셨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이 그곳에서부터는 내리막이어서 빨리 달리고 싶은 욕심이 났으나 무릎은 내리막에서 상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기림사를 지나면 이후 감포까지는 큰 오르막이 없이 편편한 길이 이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느리게 달려 내려갔다. 울릉도에서 달린다고 많이 상한 무릎에게 미안하기도 하였고 근육은 회복이 되지만 연골은 한번 상하면 회복이 되지 않는다고 하니 달릴 때 늘 조심을 해야 할 부분이다.
대회가 끝난 뒤에 김태현님의 전화를 받았는데 무릎이 아파서 병원에 다녀왔다고 하시던데 아마 힘이 남으셔서 기록을 당길 욕심으로 내리막을 빠르게 달리셔서 그런 것 같았다.
기림사 절 앞의 대일식당은 우리 가족이 감포에 살 때 자주 들렀던 곳이다. 주인 내외분이 사람이 좋으셔서 손님이 오면 그곳으로 모시고 갔던 식당인데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서 반가웠다.
이 때부터 잠이 오기 시작하더니 안동삼거리에서 양북으로 접어드는 길에서는 참기 어려울만큼 잠이 쏟아져서 깜박깜박 졸았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 부산의 아랫 동서 차로 함께 오던 딸아이가 옆에서 불렀는데도 모르더라고 했으니 정신을 놓고 있은 셈이다.
이후 감포까지는 꿈속을 달리는 것처럼 몽롱한 정신으로 달렸다.
양북면 소재지인 어일에서 감포로 가는 길은 중고등학교 시절의 추억도 많은 곳이다.
어일리 길가에 있던 친구네가 장사를 하던 다방은 흔적조차 없어져 버렸다.
고향에 근무를 할 때의 일이니 10여 년도 전의 일이지만 이제는 고인이 된 친구가 하던 양복점에서 여럿이 모여 낚시로 잡은 고기를 썰어 미역을 섞어 만든 무침회를 안주로 술을 마시다가 무슨 이야기 끝에 전촌 삼거리에서 어일까지 달려서 몇 분 안에 도착을 한다는 내기를 했는데 두 패로 나뉘어져서 그 때 돈으로 거금인 30만원을 걸고 벌인 내기에서 내가 달리기를 하는 것으로 지목이 되었고, 술을 마시다가 심야에 그 길을 달렸는데, 결국 내기 결과는 몇 분 플랫 개념과 몇 분 몇 초까지를 명확하게 하지 않아서 이기고 진 편이 없었으니 술만 진탕으로 마셨지만 그 일은 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더구나 그 사람 좋던 고향친구는 일찍 고인이 되었으니 이제는 그리운 얼굴로 내 기억 속에만 남아서 이렇게 불쑥 생각이 날 때가 있다.
팔조리를 지나면서부터는 몇 번이나 멈추어 서서 길가의 펜스를 잡고 잠을 참아야 했다. 차들이 빠르게 옆을 지나갈 때마다 겁이 덜컥나기도 했다.
길 곳곳에 커피자판기가 있었지만 몸에 지닌 비상금은 만원짜리 몇 장뿐이니 소용이 없었다.
5백원짜리 동전이라도 두어 개 준비를 해 둔다면 이럴 때 유용할 것이다.
전촌을 지날 때 보니 친구가 하는 횟집에 불이 켜져 있길래 들어가서 물을 좀 얻어먹으려다가 비록 보는 사람은 없어도 규정을 위반하면 찜찜할 것 같아서 그냥 참고 달박고개를 넘어 서는데 양북에서부터 나처럼 달리다가 걷다가 하여 앞서서니 뒤서거니 하던 조씨 성을 가진 분이 초코파이를 하나 주셔서 달게 먹었다. 몸에 오랫동안 지니고 다녀서 다 부숴진 초코파이지만 부스러기까지 남기지 않고 달게 먹었다.
참 고마운 일이었다.
이런 몽롱한 상태가 감포를 지나서 제 2 체크 포인트인 친구네 주유소와 여관입구에 갈 때까지 이어졌다. 아버지 산소가 보이는 길인 모교 뒤를 지날 때는 잠시 정신을 차려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63킬로 지점인 제 2 체크 포인트에서는 김선경선생님이 내 배낭의 맨소래담을 꺼내서 다리 마사지를 해주셨다.
지치고 아픈 곳을 쓰다듬듯이 정성껏 고루고루 마사지를 해주셔서 정말 고마웠다.
두 동서와 처제가 그곳까지 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딸아이는 차에서 잔다고 했다.
내가 달리는 것을 격려한다고 진주와 부산에서 먼 곳까지 와서 밤 내내 고생을 하는 것이 미안해서 바로 집으로 가라고 했다.
친구네 안식구가 여관입구에 의자를 내놓고 구경을 하고 있어서 인사를 했더니 안에 들어가서 자는 친구를 깨워 왔다. 고향에서 근무를 할 때는 늘 함께 어울렸던 친구인데 입이 걸쭉한 친구이니 대뜸 나를 보더니,
"야 임마야 니 돌았나?" 하는 소리부터 먼저 했다.
뭐 도와줄게 없느냐고 해서 커피를 몇 잔 달라고 하니 여러 잔을 타 내왔다.
커피를 몇 잔 마시고 나니 졸음이 좀 가셔서 이후로 30킬로는 거의 일정한 수준으로 달렸다. 제한 시간을 걱정하다가 이렇게 달리면 11시간대에도 충분하게 들어갈 수 있다는 자만심이 생길 정도로 잠을 이겨내니 몸이 빠르게 회복이 되었다.
친구가 타 준 커피와 고향을 지나올 때 선산에 누워 계시는 아버지께서 힘을 얹어주신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 앞사람과 거리는 멀었지만 한 사람 한 사람씩 추월을 할 수 있었다. 지쳐서 걷고 있던 다른 참가자들이 부러운 듯이 쳐다본다.
나는 안다. 저 눈길의 의미를. 부러움과 후회가 겹치는 순간에 앞질러 가는 사람을 쳐다보는 심정을 말이다.
양북을 지나오면서 나를 추월해갔던 여자분 한 분을 추월했다. 주변에 다른 여자분과 남자 한 분이 옆에서 함께 달려주고 있었다. 나중에 보니 이분이 여자 2위 분이었다.
중간에 대전에서 오신 해시계 박신석님을 만났는데 지쳐서 천천히 달린다고 먼저 가라고 하신다.
양포를 지나 신창으로 가는 긴 언덕에서도 천천히 달렸다. 장성동누님의 시댁마을인 신창을 지나서 영암을 지나가는 길에 남경화씨를 만났는데 나중에 보니 이분이 여자 선두였다. 대동배 지나는 곳에서 앞질러 가서 번호와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 여름에 울릉도에 달리러 오셨고 흥해마라톤클럽이 주최한 클럽대항전에서도 봤기 때문에 얼굴이 안면이 있었다. 응원차량이 따라 가고 있었고 응원을 하는 분들도 많았다. 쉬는 곳을 지나치는데 반갑게 인사를 하며 마시던 물병과 수박 한쪽을 주셨다. 이 분이 나를 아는지는 몰라도 무척 고마웠다.
이미 바다쪽은 밝아오고 있었다.
대진리로 내려가는 길의 언덕을 느리게 달려서 구포주유소 앞 80킬로 지점에서 물을 몇 잔 마시고 오이와 바나나를 몇 쪽 먹었다. 이곳은 이전에 포항에서 감포로 가는 길이 포장이 덜 되었던 시절에 성동으로 가는 포장된 이 길로 둘러 다녔기 때문에 낯익은 곳이다.
다시 내리막을 만나서 구룡포남부초등학교 쪽으로 달려 내려갔다. 이전에 구룡포삼촌댁의 사촌동생 혼사 때 눈이 쌓인 길을 온 가족을 태우고 지나가다가 내리막 급커브 빙판길에서 이리저리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사고가 난 차들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무사히 빠져나갔던 곳이다. 그 해 여름에 새로 산 갤로퍼에 장착된 정품 ABS 제동장치의 덕을 톡톡히 보았지만 지금 생각해도 등에 진땀이 나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구룡포읍의 입구인 하정으로 지나서 병포삼거리에서 집에 전화를 했다. 63킬로 지점에서 동서들을 보내면서 8시 이전에는 못 들어갈 것 같다고 했는데 예정보다 한 시간은 빨리 달려 왔으니 결승점에 도착하는 것을 보려면 미리 나오라고 전화를 했다.
14킬로쯤 남은 거리였지만 이후에 이 길은 힘이 들고 정말 지루하였다.
마지막 체크 포인트를 지날 때 쯤에는 완전히 지쳐서 걷다가 뛰다가를 반복하였는데 거리도 정확하게 몰라서 힘이 들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걷다가 뛰기를 되풀이 하니 위안은 되었다.
이미 주변은 훤하게 밝아왔고 더워지기 시작했지만 물을 마실 곳도 없었다. 허기가 져서 힘도 빠지고 다리 근육도 뭉쳐서 당기기 시작하여 무척 힘이 들었다.
이래서 경험자들이 마지막에는 1킬로 1킬로가 힘이 든다는 하였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에는 5킬로쯤 남은 지점에서 급수라도 한 번 더 해준다면 좋을 것 같았다.
방송국 송신탑이 멀리서나마 보이는 3킬로 남은 지점에 아들과 처제가 마중을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기는 했지만 계속 달릴 수 없으니 난감했다. 아들은 함께 달릴 준비를 해서 와서 같이 달리자고 했지만 절뚝거리며 달리다가 걷기를 되풀이하였다. 마지막 1키로쯤 남은 지점에서도 몇 백 미터는 걸었다. 비록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 많이 걸었지만 마지막 지점을 통과하는 순간에는 달리고 싶었다.
마침내 상생의 손이 보이는 호미곶 해맞이 광장에 접어들었다. 내 배번과 이름을 알리는 우렁찬 맨트가 울려 퍼졌다. 마지막 순간을 달리면서 억지로 웃으려고 했지만 웃음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까지 달려 온 자신이 스스로 대단하게 느껴졌다.
내 달리기의 한 획을 그은 첫 울트라마라톤 완주의 순간에는 웃을 수 있었다. 아내와 동서들과 처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포마클 회원들이 박수를 쳐주며 완주를 축하해 주었다.
광장을 걸어가며 반가운 얼굴들과 악수를 나누고 본부석 옆으로 가서 기다리다가 마사지를 받았다.
달린 거리만큼이나 긴 완주기를 쓰는 셈이다..
달리는 내내 고마운 사람들 생각이 났다.
부족한 내가 울트라마라톤을 무사히 완주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클럽회원들을 비롯한 주변의 많은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리고 대회를 거의 완벽하게 이끌어준 주최측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두고두고 잊지 않을 것이다.
도민체전 인솔 출장을 마치고 돌아와서 며칠이 지났지만 참가기를 쓴다.
아직 완전히 회복이 되지는 않았지만 운동을 다시 시작하지 못해도 조급하지 않고 오히려 느긋하다. 그리 심하게 아픈 곳도 없다.
처음 울트라에 참가를 한다면, 이미 여러 번 이야기를 했지만, 되도록 처음에는 천천히 느리게 달리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 시간을 달리는 올트라마라톤에서는 후반부에 얼마든지 만회를 할 수 있으니. 초반에 느리다고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호미곶울트라마라톤 코스처럼 험한 코스일 때는 더욱 그럴 것이다.
다시는 울트라에 참가하지 않으리라는 맹세는 허물어지고 나는 다시 가을에 서울 울트라마라톤에 참가할 것을 계획하고 있다.
그리고 내년 호미곶울트라마라톤에서는 이번의 경험을 토대로 11시간대 완주를 목표로 참가하여 달릴 것이다.
기록에 방해가 된다고 해도 작은 배낭을 매고 준비물을 갖추어서 달리는 것이 울트라다운 맛이므로 이것은 꼭 지킬 것이다. 야간에 참가하는 대회에 대비하여 소형 헤드 랜턴도 하나 준비를 하여야겠다.
아무나 할 수는 없지만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울트라맨의 신념을 지닌 채 자주 멀고 긴 길을 찾아 달리고 싶다.
다만 오랜 휴식이 필요한 울트라마라톤임을 감안한다면 전반기 대회가 대충 끝나는 5월의 호미곶 울트라마라톤과 후반기 대회가 대충 끝나는 끝나는 11월 초의 서울 울트라마라톤이 참가 적기라는 생각이 든다.
이름을 기억하는 분들 외에도 고마운 분들이 많다.
양북고개에서 물한컵을 주시던 가톨릭마라톤동호회의 형제 자매님이나 결승지점에서 반갑게 맞아준 여러 분들 모두가 고맙다.
다시 한 번 도와준 모든 분들과 그린넷마의 여러분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올린다.
울릉도에서 참가한 134번 이원락
신청을 해두고도 고민이 많았다.
처음 먼 길을 달리는 일이라서 과연 해낼 수 있을 것인가하는 걱정과 5월 하순의 바다 날씨도 가끔씩 심술을 부리니 나갈 수 있을까 하고 걱정도 되었는데 주간 일기예보에 나온 날씨가 불안하여 마지막까지 속을 좀 태웠다.
특히 사흘을 남겨두고는 16일날의 바다 날씨가 나쁜 것으로 나와서 또 신청해두고 못나갔던 지난 해 호미곶의 악몽이 되살아나는가 싶기도 했고 징크스가 될까봐 염려를 하면서 미리 전화를 해서 17일날에 나갈 수 있다면 포항에 도착을 하여 바로 호미곶으로 가더라도 한 시간 정도 뒤에 출발을 할 수 있으니 첫 번째 체크 포인트의 제한 시간만이라도 완화해 달라고 할까하는 생각도 해봤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16일날 배가 들어와서 나갈 수 있었고 다음날에는 무사히 출발선에 설 수 있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참가기를 쓸 때쯤에는 고통이든 희열이든 이미 잊혀져 가는 시점일 것이다.
나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미 잊어버렸거나 흐릿한 기억을 되살린다기 보다는 꼭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은 분들에 대한 예의로 이 글을 시작한다.
우리 포마클의 정수영 회장님, 박영인사무국장님, 안천수 훈련부장님, 김도기님, 김선경선생님, 김영근님,.........
그리고 함께 달리기의 즐거움을 누리는 동서들, 처제들..........
그리고 직장 때문에 섬에 혼자 떨어져 있는 나를 이해해주는 가족들.
잠을 참으며 웃는 낯으로 힘을 주시고 친절하게 봉사를 해주신 오천마라톤클럽과 그린넷마의 여러분들.
고마운 분들이 너무 많다. 달리는 동안에 내가 완주가 가능하다면 바로 이런 고마운 분들의 도움 덕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코스를 먼저 달려보신 지천명 최성열님과 클럽의 김도기님의 귀한 충고와 도움에는 이 자리를 빌어 특별히 감사를 표한다. 최성열님의 글을 읽고 결심을 다졌고 김도기님은 초반에는 무조건 천천히 달리라는 충고의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는데 과연 금과옥조로 삼을 경험에서 우러나온 귀한 충고였다.
완주는 하였지만 기록이 저조한 것은, 대회 사흘 전부터 겹친 각종 체육 행사와 시카고에서 오신 누님 내외를 안내한다고 시간을 내느라 잠이 부족하였던 것과 마지막 마무리 장거리주 점검을 너무 멀리하였고 오르막내리막 길을 힘들게 달린 탓에다가 이틀 전에 울릉군민체전에 참가하여 20키로 정도를 달린 것까지 모두 지나치게 무리를 하였기 때문에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다.
그러나 완주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으므로 이 장거리 점검주가 무익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지만 피로가 쌓여서 달리는 날은 낮에도 눈이 감길 지경이어서 손님들이 집에 있어도 할 수 없이 아들 녀석의 방에 혼자 들어가서 잠을 좀 자두려고 누워 봤지만 머릿속이 어지러운지 잠은 잘 수가 없었다.
무리한 연습을 한 까닭으로 허벅지 뒤쪽의 햄스트링이 굳어서 당기고 장딴지에 통증이 남아 있었다. '이런 몸 상태로 달릴 수 있을까' 아니 '달려야 하는가' 하고 심각하게 고민을 하다가 이왕 달리려고 신청을 했고 최고 기록에 도전을 하는 것도 아니니 한 번 부딪혀보자는 쪽으로 마음을 굳히고 급하게 스포츠마사지를 한 번 받은 뒤에 참가하기로 결정을 했다.
언젠가 울트라에 도전을 할 때 메고 달리려고 지난 해 사 둔 울트라용 8리터 짜리 도이터 배낭은 이미 몇 번 둘러메고 달려서 몸에 익어 있었는데 가볍고 몸에 착 달라붙어서 편리하고 좋아서 잘 샀다는 생각을 몇 번이고 했고 다른 분들에게 권하기도 한다.
헤드 랜턴은 이전에 등산용으로 산 것이 두 개나 있는데 달릴 때 지니기에는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가지고 갔으나 그냥 두고 달렸고 연양갱, 쵸코바, 에너지젤 등의 먹을 것을 두루 준비를 하였으나 주로에서 공급하는 음식료가 충분하여서 굳이 지닐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나중에 진전고개에서 짐을 던다고 김도기님께 모두 맡겼다. 그러나 80킬로쯤에서는 배가 고프기도 하여서 두어 개는 남겨 둘걸 하고 후회를 하기도 했다. 중간 물품 교환 지점에 미리 보내 두었다가 찾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체온의 유지를 위한 가벼운 점퍼류는 경우에 따라 꼭 필요하므로 반드시 하나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내 경우에는 이런 옷을 미리 준비한 것이 천만다행이었기 때문이다.
이 코스를 경험하신 분들의 충고대로 진전고개까지는 무조건 천천히 달렸다.
가능하다면 비슷한 수준의 다른 이들과 같이 달리려고 했는데 우리 포항마라톤클럽의 참가자들은 전부 고수들이라서 출발을 하기 전에 잠깐 얼굴을 본 것을 제외하고는 뵙지 못했다. 그래서 출발하여 달리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파트너를 물색을 했다.
초반에는 울산에서 오신 분과 연일에서 개업약사로 일하시는 두 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달렸다. 이분들도 처음 참가를 하고 대략 14시간 정도의 기록을 목표로 한다는 말을 듣고는 내심 파트너로 점을 찍었고 착 달라붙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뛰었다.
노을이 지는 구만리를 지나서 멀리 포항의 북부 해안이 보이는 해안선을 끼고 달리는 길고 긴 오르막내리막 길이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그리 부담이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호미곶 마라톤 코스의 일부 구간인 도구까지 나오는 동안에는 걷지는 않았다.
울산에서 오셨다는 외환은행에 근무하는 박영철님과 포항시약사회 소속의 이택관님(이분과는 춘천마라톤에 참가를 하여 주로에서 인사를 한 탓에 서로 반갑게 만났음)인데 꾸준하게 1키로당 6분 30초 정도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달릴 수 있어서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처음부터 일정한 페이스로 느리게 달렸기 때문에 더 이상 추월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달려가는 것이 보였지만 뒤에서 달리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
느리게 다른 이들과 어울려서 달리니 몸의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카시아꽃 향기가 짙은 어둠 속을 밤에 달리는 일을 처음 겪어보는 탓인지 가벼운 흥분으로 들뜬 탓인지 앞으로 닥칠 상황이 두려웠지만 처음의 걱정보다는 허벅지와 장딴지의 상태가 나았기 때문에 기분은 상쾌했다. 어두운 주로를 달리는데 헤드 랜턴을 준비하지 않아서 걱정이 되었는데 함께 달리는 두 분이 모두 헤드 랜턴을 장착하여서 도움을 받았다.
눈앞에 깜박이다가 사라지는 반딧불이처럼 앞서서 달리는 이들의 안전등이 이따금 반짝거리니 나중에 어둠 속에 혼자 남겨질 일이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오천을 지날 무렵에는 달이 올라오기 시작하여 말 그대로 월광소나타였기 때문에 이 걱정은 한갓 기우였지만 만약 어두웠다면 가벼운 페츨 티카 종류의 헤드 랜턴은 반드시 준비를 하여야하겠다는 것을 느꼈다.
시카고 누님 내외와 포항 큰 누님을 비롯한 친척들이 한꺼번에 구룡포에 살고 계시는 이종사촌 누님댁으로 이동을 하는 일정에 맞춰서 이동을 한다고 머뭇거리다가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집을 나섰기 때문에 출발하기 전에 배가 약간 고픈 상태였다. 그래서 첫 음료 공급처인 19킬로 지점에서 물과 간식을 넉넉하게 먹었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주로에서 봉사를 하는 분들의 반가움 외침은 큰 힘이 되었다.
나는 이곳의 지리에 훤하니 별 문제가 없지만 먼 곳에서 오신 분들에게는 자원봉사를 하는 분들의 친절한 길 안내가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긴 거리를 달리면서도 갈림길의 주로 안내와 주로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분들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서 달리는 내내 과연 그린넷마답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고 우리 클럽이 다음에 이런 행사를 주최한다면 회원 모두가 열 일을 제쳐두고 완벽한 대회진행을 위하여 봉사를 하여야 할 것임을 깨달았다.
청림 4거리를 지나서 오천읍내 외곽도로 쪽으로 접어들어서는 함께 달리던 두 분이 먼저 치고 나가 버렸다. 25킬로 정도를 달려오면서 이미 지치기 시작하여 함께 달리면서도 말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침묵 속에서 함께 달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혼자 달리는 것이 더 났다는 생각을 할 무렵이어서 덜 섭섭했다.
어쨌든 진전고개까지는 천천히 달려야겠다는 결심을 한 번 더 확인을 하면서 달렸다.
출발 전에 잠깐 뵈었던 김선경선생님께서 차를 타고 이동을 하면서 곳곳에서 멈추어서 소리를 질러 격려를 해주셨다.
첫 번째 체크 포인트인 용산주유소에서 김영근님이 기다리시다가 격려를 해주셨다.
김도기님께서 이것저것 챙겨 주셨고 배가 고파서 숭늉을 두 그릇이나 먹었다. 위에 그리 부담을 주는 음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배가 고픈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음식료를 공급하는 곳마다 물과 바나나 등을 넉넉하게 먹고 마셨는데 미리 카보로딩을 하지 못한 나로서는 잘 한 일이었던 것 같았다.
용산을 지나서 갈평으로 접어드는 길은 달빛이 교교했다.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다니는 부산이나 울산 대구 등의 외지 번호판을 단 차들 외에는 차들이 별로 보이지 않아서 야간 울트라 코스치고는 멋진 코스라는 생각을 했다.
갈평 피정의 집 근처를 지날 때는 영양본당에 나갈 때 그곳에 계시면서 우리 가족들에게 정을 듬뿍 쏟아주셨던 김한모바오로신부님이 생각이 났다. 갈평 피정의 집으로 가는 길을 물어셨던 한 순간의 기억이지만 고마운 마음을 늘 마음 속에 간직하고 살고 있으니 이렇듯 생각이 나나보다.
갈평에서 진전으로 이어지는 골짜기는 6.25 때 우리 부모님이 피난을 가셨다는 곳이다. 그 때는 난리를 피해서 숨을만큼 골짜기 중의 골짜기였다지만 이제는 길이 넓어지고 포장이 되어서 차들이 씽씽 달리는 풍광이 좋은 곳이어서 쉰을 바라보는 자식이 그 길을 달리고 있으니 세월의 흐름은 이렇듯 많은 변화를 가져오나 보다.
진전고개 꼭대기까지는 걷다가 뛰다가 하였지만 무리를 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달빛에 드러난 골짜기를 둘러보거나 계곡을 내려다보며 달렸다.
중간에 정수영회장님이 트럭을 몰고 지나가시면서 등뒤에서 파이팅을 외쳐주시고는 앞 주자들을 만나신다고 가셨다.
진전고개에서는 넉넉하게 쉬었다.
호박죽을 한 그릇 먹고 나서 물을 충분하게 마시고 바나나도 한쪽 먹었다.
입고 있던 옷이 젖어서 한기가 심하게 들어서 얇은 긴 팔 옷을 꺼내 입었다. 블랙야크 제품의 쿨맥스인 이 옷도 겨울철 대회나 이럴 때 여러 번을 참 유용하게 입었다.
김도기님께서 허벅다리 부분을 마사지 해주셨고 발목을 젖히고 돌려서 뭉친 다리 근육을 풀어 주셔서 두고두고 고맙게 생각한다.
고개마루에서 기다리시던 박영인국장님이 격려를 해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음날 본인이 평택까지 달리러 가셨다는데 참 고마운 일이다.
이경미선생님도 만났다. 대동배쯤에서 앞으로 치고 나가시던데 고개 마루에는 나보다 뒤에 도착을 하신 것 같았다.
김태현님이 뒤에 고개 마루에 도착을 하셨는데 별로 피로한 기색이 없어 보여서 남은 구간은 여유있게 달리실 것 같아 보였다.
출발을 한 지 다섯 시간쯤이 지나서 하루 날짜가 바뀌었다.
달리려고 나서는데 긴 팔 옷으로 갈아입었는데도 온 몸에 한기가 들어서 배낭 속에 준비해 간 방풍점퍼를 꺼내 입으니 좀 덜하였는데 이런 준비를 한 것이 두고두고 다행스러웠다. 하도 떨고 있으니 김태현님이 놀라시면서 그리 추우냐고 물으셨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이 그곳에서부터는 내리막이어서 빨리 달리고 싶은 욕심이 났으나 무릎은 내리막에서 상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기림사를 지나면 이후 감포까지는 큰 오르막이 없이 편편한 길이 이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느리게 달려 내려갔다. 울릉도에서 달린다고 많이 상한 무릎에게 미안하기도 하였고 근육은 회복이 되지만 연골은 한번 상하면 회복이 되지 않는다고 하니 달릴 때 늘 조심을 해야 할 부분이다.
대회가 끝난 뒤에 김태현님의 전화를 받았는데 무릎이 아파서 병원에 다녀왔다고 하시던데 아마 힘이 남으셔서 기록을 당길 욕심으로 내리막을 빠르게 달리셔서 그런 것 같았다.
기림사 절 앞의 대일식당은 우리 가족이 감포에 살 때 자주 들렀던 곳이다. 주인 내외분이 사람이 좋으셔서 손님이 오면 그곳으로 모시고 갔던 식당인데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서 반가웠다.
이 때부터 잠이 오기 시작하더니 안동삼거리에서 양북으로 접어드는 길에서는 참기 어려울만큼 잠이 쏟아져서 깜박깜박 졸았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 부산의 아랫 동서 차로 함께 오던 딸아이가 옆에서 불렀는데도 모르더라고 했으니 정신을 놓고 있은 셈이다.
이후 감포까지는 꿈속을 달리는 것처럼 몽롱한 정신으로 달렸다.
양북면 소재지인 어일에서 감포로 가는 길은 중고등학교 시절의 추억도 많은 곳이다.
어일리 길가에 있던 친구네가 장사를 하던 다방은 흔적조차 없어져 버렸다.
고향에 근무를 할 때의 일이니 10여 년도 전의 일이지만 이제는 고인이 된 친구가 하던 양복점에서 여럿이 모여 낚시로 잡은 고기를 썰어 미역을 섞어 만든 무침회를 안주로 술을 마시다가 무슨 이야기 끝에 전촌 삼거리에서 어일까지 달려서 몇 분 안에 도착을 한다는 내기를 했는데 두 패로 나뉘어져서 그 때 돈으로 거금인 30만원을 걸고 벌인 내기에서 내가 달리기를 하는 것으로 지목이 되었고, 술을 마시다가 심야에 그 길을 달렸는데, 결국 내기 결과는 몇 분 플랫 개념과 몇 분 몇 초까지를 명확하게 하지 않아서 이기고 진 편이 없었으니 술만 진탕으로 마셨지만 그 일은 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더구나 그 사람 좋던 고향친구는 일찍 고인이 되었으니 이제는 그리운 얼굴로 내 기억 속에만 남아서 이렇게 불쑥 생각이 날 때가 있다.
팔조리를 지나면서부터는 몇 번이나 멈추어 서서 길가의 펜스를 잡고 잠을 참아야 했다. 차들이 빠르게 옆을 지나갈 때마다 겁이 덜컥나기도 했다.
길 곳곳에 커피자판기가 있었지만 몸에 지닌 비상금은 만원짜리 몇 장뿐이니 소용이 없었다.
5백원짜리 동전이라도 두어 개 준비를 해 둔다면 이럴 때 유용할 것이다.
전촌을 지날 때 보니 친구가 하는 횟집에 불이 켜져 있길래 들어가서 물을 좀 얻어먹으려다가 비록 보는 사람은 없어도 규정을 위반하면 찜찜할 것 같아서 그냥 참고 달박고개를 넘어 서는데 양북에서부터 나처럼 달리다가 걷다가 하여 앞서서니 뒤서거니 하던 조씨 성을 가진 분이 초코파이를 하나 주셔서 달게 먹었다. 몸에 오랫동안 지니고 다녀서 다 부숴진 초코파이지만 부스러기까지 남기지 않고 달게 먹었다.
참 고마운 일이었다.
이런 몽롱한 상태가 감포를 지나서 제 2 체크 포인트인 친구네 주유소와 여관입구에 갈 때까지 이어졌다. 아버지 산소가 보이는 길인 모교 뒤를 지날 때는 잠시 정신을 차려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63킬로 지점인 제 2 체크 포인트에서는 김선경선생님이 내 배낭의 맨소래담을 꺼내서 다리 마사지를 해주셨다.
지치고 아픈 곳을 쓰다듬듯이 정성껏 고루고루 마사지를 해주셔서 정말 고마웠다.
두 동서와 처제가 그곳까지 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딸아이는 차에서 잔다고 했다.
내가 달리는 것을 격려한다고 진주와 부산에서 먼 곳까지 와서 밤 내내 고생을 하는 것이 미안해서 바로 집으로 가라고 했다.
친구네 안식구가 여관입구에 의자를 내놓고 구경을 하고 있어서 인사를 했더니 안에 들어가서 자는 친구를 깨워 왔다. 고향에서 근무를 할 때는 늘 함께 어울렸던 친구인데 입이 걸쭉한 친구이니 대뜸 나를 보더니,
"야 임마야 니 돌았나?" 하는 소리부터 먼저 했다.
뭐 도와줄게 없느냐고 해서 커피를 몇 잔 달라고 하니 여러 잔을 타 내왔다.
커피를 몇 잔 마시고 나니 졸음이 좀 가셔서 이후로 30킬로는 거의 일정한 수준으로 달렸다. 제한 시간을 걱정하다가 이렇게 달리면 11시간대에도 충분하게 들어갈 수 있다는 자만심이 생길 정도로 잠을 이겨내니 몸이 빠르게 회복이 되었다.
친구가 타 준 커피와 고향을 지나올 때 선산에 누워 계시는 아버지께서 힘을 얹어주신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 앞사람과 거리는 멀었지만 한 사람 한 사람씩 추월을 할 수 있었다. 지쳐서 걷고 있던 다른 참가자들이 부러운 듯이 쳐다본다.
나는 안다. 저 눈길의 의미를. 부러움과 후회가 겹치는 순간에 앞질러 가는 사람을 쳐다보는 심정을 말이다.
양북을 지나오면서 나를 추월해갔던 여자분 한 분을 추월했다. 주변에 다른 여자분과 남자 한 분이 옆에서 함께 달려주고 있었다. 나중에 보니 이분이 여자 2위 분이었다.
중간에 대전에서 오신 해시계 박신석님을 만났는데 지쳐서 천천히 달린다고 먼저 가라고 하신다.
양포를 지나 신창으로 가는 긴 언덕에서도 천천히 달렸다. 장성동누님의 시댁마을인 신창을 지나서 영암을 지나가는 길에 남경화씨를 만났는데 나중에 보니 이분이 여자 선두였다. 대동배 지나는 곳에서 앞질러 가서 번호와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 여름에 울릉도에 달리러 오셨고 흥해마라톤클럽이 주최한 클럽대항전에서도 봤기 때문에 얼굴이 안면이 있었다. 응원차량이 따라 가고 있었고 응원을 하는 분들도 많았다. 쉬는 곳을 지나치는데 반갑게 인사를 하며 마시던 물병과 수박 한쪽을 주셨다. 이 분이 나를 아는지는 몰라도 무척 고마웠다.
이미 바다쪽은 밝아오고 있었다.
대진리로 내려가는 길의 언덕을 느리게 달려서 구포주유소 앞 80킬로 지점에서 물을 몇 잔 마시고 오이와 바나나를 몇 쪽 먹었다. 이곳은 이전에 포항에서 감포로 가는 길이 포장이 덜 되었던 시절에 성동으로 가는 포장된 이 길로 둘러 다녔기 때문에 낯익은 곳이다.
다시 내리막을 만나서 구룡포남부초등학교 쪽으로 달려 내려갔다. 이전에 구룡포삼촌댁의 사촌동생 혼사 때 눈이 쌓인 길을 온 가족을 태우고 지나가다가 내리막 급커브 빙판길에서 이리저리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사고가 난 차들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무사히 빠져나갔던 곳이다. 그 해 여름에 새로 산 갤로퍼에 장착된 정품 ABS 제동장치의 덕을 톡톡히 보았지만 지금 생각해도 등에 진땀이 나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구룡포읍의 입구인 하정으로 지나서 병포삼거리에서 집에 전화를 했다. 63킬로 지점에서 동서들을 보내면서 8시 이전에는 못 들어갈 것 같다고 했는데 예정보다 한 시간은 빨리 달려 왔으니 결승점에 도착하는 것을 보려면 미리 나오라고 전화를 했다.
14킬로쯤 남은 거리였지만 이후에 이 길은 힘이 들고 정말 지루하였다.
마지막 체크 포인트를 지날 때 쯤에는 완전히 지쳐서 걷다가 뛰다가를 반복하였는데 거리도 정확하게 몰라서 힘이 들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걷다가 뛰기를 되풀이 하니 위안은 되었다.
이미 주변은 훤하게 밝아왔고 더워지기 시작했지만 물을 마실 곳도 없었다. 허기가 져서 힘도 빠지고 다리 근육도 뭉쳐서 당기기 시작하여 무척 힘이 들었다.
이래서 경험자들이 마지막에는 1킬로 1킬로가 힘이 든다는 하였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에는 5킬로쯤 남은 지점에서 급수라도 한 번 더 해준다면 좋을 것 같았다.
방송국 송신탑이 멀리서나마 보이는 3킬로 남은 지점에 아들과 처제가 마중을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기는 했지만 계속 달릴 수 없으니 난감했다. 아들은 함께 달릴 준비를 해서 와서 같이 달리자고 했지만 절뚝거리며 달리다가 걷기를 되풀이하였다. 마지막 1키로쯤 남은 지점에서도 몇 백 미터는 걸었다. 비록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 많이 걸었지만 마지막 지점을 통과하는 순간에는 달리고 싶었다.
마침내 상생의 손이 보이는 호미곶 해맞이 광장에 접어들었다. 내 배번과 이름을 알리는 우렁찬 맨트가 울려 퍼졌다. 마지막 순간을 달리면서 억지로 웃으려고 했지만 웃음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까지 달려 온 자신이 스스로 대단하게 느껴졌다.
내 달리기의 한 획을 그은 첫 울트라마라톤 완주의 순간에는 웃을 수 있었다. 아내와 동서들과 처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포마클 회원들이 박수를 쳐주며 완주를 축하해 주었다.
광장을 걸어가며 반가운 얼굴들과 악수를 나누고 본부석 옆으로 가서 기다리다가 마사지를 받았다.
달린 거리만큼이나 긴 완주기를 쓰는 셈이다..
달리는 내내 고마운 사람들 생각이 났다.
부족한 내가 울트라마라톤을 무사히 완주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클럽회원들을 비롯한 주변의 많은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리고 대회를 거의 완벽하게 이끌어준 주최측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두고두고 잊지 않을 것이다.
도민체전 인솔 출장을 마치고 돌아와서 며칠이 지났지만 참가기를 쓴다.
아직 완전히 회복이 되지는 않았지만 운동을 다시 시작하지 못해도 조급하지 않고 오히려 느긋하다. 그리 심하게 아픈 곳도 없다.
처음 울트라에 참가를 한다면, 이미 여러 번 이야기를 했지만, 되도록 처음에는 천천히 느리게 달리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 시간을 달리는 올트라마라톤에서는 후반부에 얼마든지 만회를 할 수 있으니. 초반에 느리다고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호미곶울트라마라톤 코스처럼 험한 코스일 때는 더욱 그럴 것이다.
다시는 울트라에 참가하지 않으리라는 맹세는 허물어지고 나는 다시 가을에 서울 울트라마라톤에 참가할 것을 계획하고 있다.
그리고 내년 호미곶울트라마라톤에서는 이번의 경험을 토대로 11시간대 완주를 목표로 참가하여 달릴 것이다.
기록에 방해가 된다고 해도 작은 배낭을 매고 준비물을 갖추어서 달리는 것이 울트라다운 맛이므로 이것은 꼭 지킬 것이다. 야간에 참가하는 대회에 대비하여 소형 헤드 랜턴도 하나 준비를 하여야겠다.
아무나 할 수는 없지만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울트라맨의 신념을 지닌 채 자주 멀고 긴 길을 찾아 달리고 싶다.
다만 오랜 휴식이 필요한 울트라마라톤임을 감안한다면 전반기 대회가 대충 끝나는 5월의 호미곶 울트라마라톤과 후반기 대회가 대충 끝나는 끝나는 11월 초의 서울 울트라마라톤이 참가 적기라는 생각이 든다.
이름을 기억하는 분들 외에도 고마운 분들이 많다.
양북고개에서 물한컵을 주시던 가톨릭마라톤동호회의 형제 자매님이나 결승지점에서 반갑게 맞아준 여러 분들 모두가 고맙다.
다시 한 번 도와준 모든 분들과 그린넷마의 여러분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올린다.
울릉도에서 참가한 134번 이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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