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1. 12. 00:30ㆍ미련이 남아있는 마라톤 이야기/두리번 거리면서 걷기
1. 출발 직전의 설레임
걸으면서 느낀 순간순간의 고통스럽던 기억은 다 사라지고 하루가 지났지만 벌써 추억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집에서 출발하면 불과 한 시간 거리 밖에 되지 않는 황성공원이지만
일찍 가면 마땅하게 시간을 보낼거리가 없다는 이유를 핑계로 미적거리다가 거금을 들여서 택시를 타고 갔습니다.
지난 해 밤 새워 걷기를 마치고 따신 국밥 한 그릇을 얻어먹고
곧바로 운전을 해서 집에 오면서 짧은 순간이지만 깜빡 졸다가
하마터면 도로 중앙의 가드레일을 들이받을 뻔 했던 일이 있었기에 매사에 조심을 하자는 생각에 거금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미친 짓이야!”
중학교 다닐 때 배웠던 국어교과서에 나온 소설에서, 사냥에 참가했지만 그런 일에 동의할 수 없다는 주인공이 내뱉은 독백입니다.
40년이 더 지난 이전 시절에 배운 소설에 나온 말이지만, 살면서 가끔씩 스스로에게 내 뱉어온 독백입니다.
걷는 내내 이 말이 생각났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어쩔 수없이 걷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해서 참가한 일인데도 지치고 힘드니 이런 소리가 절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걷기대회 전 구간에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듯 손을 흔드는 억새를 보며,
모퉁이마다 마중을 나와 반겨주던 달빛을 받으며,
물가에 어린 산 그림자를 보면서,
코끝에 전해오던 싸늘한 공기를 마시며 걷을 때는 무척 행복하였습니다.
지난 해 잔뜩 챙겨갔던 먹을거리를 절반도 먹지 않고 고스란히 도로 가져왔던 일은 다 잊어버리고
마치 길 가다가 굶어 쓰러질 것을 염려하는 사람처럼,
물 두 병, 손수 내려 물에 탄 더치커피 한 병, 과일 주스 팩 5개, 감 두 개, 사과 한 개, 영양바와 초클릿, 견과류, 흑미떡 한 봉지, 등
먹고 마실 것을 바리바리 배낭에 넣어갔습니다.
저녁 대신에 가져간 찰떡을 먹고 나서,
배번과 함께 지급받은 물품을 천막 뒤에서 가득차서 터질 것 같은 배낭에 쑤셔 넣어 정리를 하는데,
사회자의 힘찬 멘트로 식전행사가 시작되었고
색소폰으로 연주하는 “신라의 달밤” 가락이 흘러나왔습니다.
나중에 다른 분들이 찍은 사진을 보니 색소폰 연주자가 멋쟁이여서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이 아쉬웠습니다.
대구에서 온 혼성밴드가 공연을 할 때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서 관람을 하였습니다.
출발을 기다리며 공연을 구경하고......
이어서 경주의 애밀레색소폰동호회 팀의 연주가 있었습니다.
연주 끝에 앵콜송으로 다시 들려 준 “신라의 달밤” 노래는 음색이 애조를 띠는 색소폰이라는 악기와 정말 잘 어울렸습니다.
연주하는 곡을 따라 흥얼거리면서 무겁게 가라앉았던 기분도 차츰 나아졌습니다.
이주여성들이 나와서 우리민요인 “달타령”을 불러서 박수를 받았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많은 참가자들이 모여들었고,
설레는 표정으로 서성거리거나
주위사람들과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앞으로 닥칠 어려움에 대한 걱정어린 눈치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단체로 온 칠곡 순심의 여학생들은 한 곳에 모여서 인솔해 오신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옆 친구와 수다를 떨다가도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오면 몸을 흔들기도 하였습니다.
오십보백보라는 단체에서는 고어텍스 홍보를 하면서 형광 고리를 나누어 주고.......
기다리다 지쳐서 출발지점에서 서성거리기도 하고......
내빈 축사 등의 식전 행사가 끝나고.......
출발 직전에,
참석한 기관단체장들이 출발선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장면을 끼어들어서 몇 컷찍고 있는데
축하불꽃을 몇 발 쏘아댔습니다.
밀물처럼 물려든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후미에서 출발을 했는데,
참가자의 인적사항을 미리 기록해서 배부하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체크카드를 출발선에서 배부를 하여 더 혼잡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30킬로미터 참가자와 66킬로미터 참가자를 구분해서
시차를 두고 출발시켜 혼잡을 덜자는 의도인지는 몰라도 그런 효과는 전혀 없었습니다.
또 직장동료나 가족이 서로 다른 코스에 참가한 경우도 많아서
아쉬운 대로 코스가 갈라지는 10킬로미터까지는 함께 걷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앞으로 닥칠 고통을 예상하지 못하는 첫 참가자인 학생들이
웃고 떠들면서 왁자지껄하게 이동을 하는 것을 보니 오히려 부럽기조차 했습니다.
다만 좁은 길을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이동을 하는데 뛰어다니며 방향을 갑자기 바꾸는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어서
다칠 것이 염려되기는 했습니다.
또 일부이기는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지정된 고수부지 길이 아닌 차도로 올라가서 걷다가
신경질을 부리는 운전자들의 핀잔을 듣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안전에 위협이 되는 행동은 자제를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가 즐겨서 하는 일이니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배려가 아쉽기도 했습니다.
고수부지 길바닥은 우레탄포장이 되어 있어서 이전보다 걷기가 편했습니다만,
한꺼번에 밀려서 앞사람 뒤통수만 쳐다보고 이동을 하다 보니,
차량통행을 막기 위해 설치해둔 시설이 갑자기 나타나서 부딪힐 뻔 한 경우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대충 위치를 알고 있으니 동천의 경주소방서 앞을 지나 알천 강변축구장 쪽으로 가는 길이 지루하지는 않았습니다.
운동을 하기 위해서 나와서 멋모르고 반대방향에서 오시는 분들이 가끔 눈에 띄어서 미안하기조차 했습니다.
알천 고수부지 길을 따라 가는 중간 쉼터 곳곳에는 단체로 참가한 사람들은 음식을 나누어 먹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2. 그냥 떠밀려서 보문까지
보문단지로 접어드는 도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들어 가는 길에서 몇 사람이 중간에 숲길로 가로질러 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옆에서 걷던 어떤 사람이,
“저런 사람들은 165리가 아니라 160리를 걷는갑따” 해서 웃었지만,
‘내가 좋아서 참가한 것이니 한걸음이라도 코스가 아닌 길로 걷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바람이 제법 불어서 그런지 보문호에 비친 반영이 흐려서 아쉬웠습니다.
지난여름 연수 때 경주에 머물면서,
저녁을 먹고 나서
연수 동료들과 함께 폴모리아 테라스에 앉아서 보문호를 내다보았던 생각도 났습니다.
앞만 보고 걷는 자신과는 달리 잘 닦여진 산책로를 여유롭게 걷는 투숙객들이 부러웠지만,
한편으로는 대단한 사람인양 쳐다보는 눈길을 의식하며 어깨를 으쓱했습니다.
두 코스의 갈림길인 10킬로미터 지점에서 올해는 음악동호인들의 연주행사가 없어서 아쉬웠습니다만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았으니 바쁘게 앞사람을 따라 걸었습니다.
육부촌 옆을 지나서 6차선 도로를 안내하는 분들의 보호 아래 안전하게 건넌 뒤 무궁화동산의 화장실에 들렀다가 다시 걸었습니다.
블랙 스미스라는 이태리 레스토랑입니다.
같은 건물 안에 커피집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리공방이라는 말은 뭥미?
수상공연장 무대 옆의 상징탑입니다.
손각대로 찍은 보문호 야경(?)입니다.
감도를 높여도 이 정도 밖에 찍을 수 없었습니다.
찻집 겸 간이주점 폴모리아입니다.
66킬로미터 코스와 30킬로미터 코스의 갈림길입니다.
대략 10킬로미터 지점이고, 육부촌 옆입니다.
3. 힘들고 지루해지기 시작하니.......
이때부터는 어둠이 짙게 내려와 있는 길을 걸었는데,
맞은편 손곡 쪽의 콘도나 골프장에 대낮같이 켜진 불을 보고
밤늦은 시간에 저렇게 불을 밝히면 짐승도 식물도 잠을 자지 못 할 터인데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잠시 하기도 했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젊은 학생들은 냅다 달립니다.
또 어느 곳에서는 벌써 지쳐서 갓길에 드러누워 있는 학생들도 보입니다.
반면에 오히려 힘들어해 보일 어른들은 묵묵히 걷습니다.
적어도 165리를 걷겠다고 나서는 어른들은 그래도 어느 정도는 걷는데 이력이 난 분들일 테니
나잇살 때문에 힘들거라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싶었습니다.
지난 해도 그런 것을 느껴었는데 올해도 이동하는 중간에 먹고 버린 봉지들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적어도 걷기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이라면 다른 누구보다도 반듯한 사람들일텐데
무심코라도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땀이 나서 티셔츠가 다 젖었습니다.
배낭을 메고, 카메라 보조백 끈을 목에 걸고,
고정하는 끈을 허리에 두르고 가다보니 윗옷을 벗는 게 쉽지않다는 핑계로 그냥 갔는데,
이 때 흘린 땀으로 속옷이 다 젖어서 나중에 30킬로 지점에서 한기를 만나 몸을 덜덜 떨었습니다.
무장산 위에 솟은 달은 토함산과 무장산 사이를 수시로 오가며 덕동댐 갓길을 걷는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덕동댐 옆을 지나가는 암곡의 좁은 구비구비길을 돌 때마다 달을 쳐다보았습니다.
어두워져봐야 달빛 고마운 줄을 안다지만,
남이 무엇을 베풀어줘도 당연한 듯이 무심코 지내니
살면서 고맙던 사람들에 대해 미쳐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20킬로 체크포인트가 참 멀게 느껴집니다.
벌써 지쳐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달리거나 걸을 때 다음 거리 표지판이 “벌써?” 인가 싶을 때도 있고 “아직도?” 인가 싶을 때도 있는데
바로 몸의 컨디션을 재는 척도로 볼 수 있습니다.
첫 스탬프를 찍을 때는 그래도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짐 무게를 줄인다고 물 한 병을 통째로 다 마셨더니 오줌보가 탱탱한데
앞뒤로 다 사람들이 함께 이동하니 볼 일 볼 기회가 없어서 끙끙대기도 했습니다.
나이 든 사람들 가운데는 짐을 잔뜩 짊어지고 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운동화를 신고 동네 길에 산책을 나온 것처럼 배낭도 없이 가볍게 잘도 앞서 가니
그런 사람들이 부러워 제 자신의 미련한 심성 탓을 해보았습니다.
덕동호끝인 감포로 가는 도로 위에 올라서서 시계를 보니 열두시가 훨씬 넘어 있었습니다.
건널목마다 여러 사람이 서서 안전하게 건널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는 것이 참 고맙습니다.
기온은 이미 많이 내려갔는데
몇 시간을 서서 안내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텐데도 큰소리로 힘내라고 격려를 해줍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고 했지만 지친 탓에 목소리에 힘이 빠져서 그 분들이 듣기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거리 표시 현수막을 찍는다고 카메라를 끄집어내니,
작은 카메라를 들고 기록사진을 찍고 있던 분이 깜짝 놀라시면서,
"그렇게 무거운 장비를 가지고 다니시냐?"고 합니다.
와룡쉼터 근처입니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들어서
덕동댐 둘레길을 6킬로미터 정도 걷습니다.
20킬로미터 지나서 첫번째 체크포인트입니다.
여기서 체크카드에 첫번째 스탬프를 찍었고 경광봉을 나누어줬습니다.
덕동댐 둘레길을 지나서 감포로 가는 차도로 진입하는 순간입니다.
이곳에서 간식으로 라면을 주는 추령재의 백년찻집까지는 대략 3킬로미터쯤 됩니다.
늦은 시간에도 도로에 차가 제법 다니기 때문에 안전에 각별하게 유의하여야하는 구간입니다.
덕동댐 끝에서 백년찻집 입구까지 3킬로미터는
갓길이 제대로 없어서 조심해서 걸어야 하는 구간인데도
도로 가운데 쪽으로 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서 보는 사람이 다 조마조마합니다.
백년찻집 간판이 보이는 추령재 입구에서 간판사진을 찍고 나니 따뜻한 국물이 있는 라면을 먹을 생각에 힘이 납니다.
올라가는 길 수백 미터에 지등(紙燈)이 켜져 운치가 있었습니다.
무슨 까닭인지 도로 한 쪽이 새로 말끔하게 포장되어 있어서 발바닥이 그런대로 편했습니다.
이 몇 백 미터 밖에 되지 않는 길도 지치면 힘든 거리입니다.
바닥이 편안한 길을 걸으면서
추령재를 사이에 두고 새로 포장된 길을 오르락내리락하면 겨울철 마라톤 훈련 장소로 멋지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번 겨울에 날 잡아서 다시 두서너 번 다녀가야겠다는 엉뚱한 생각도 했습니다.
터널이 뚫리기 이전에 고갯마루의 휴게소 건물을 개조해서 문을 연 백년찻집은
경주에서 모임을 할 때나 멀리서 온 손님을 맞을 때 해가 지고나서 몇 번 이곳에 갔었는데 모두 다 분위기가 근사하다던 곳입니다.
4. 라면이 이렇게 맛있을 줄이야......
시간이 늦어서 백년찻집에 들어가는 대신에 바로 간식으로 주는 라면을 하나 챙겨들고 바닥에 주저앉아 먹었습니다.
지난 해 주던 컵라면 보다는 왕두껑인가 이번에 먹은 것이 더 낫더군요.
집에서는 평생가도 라면 한 번 끓여먹지 않는데 여기서 먹는 것은 맛있습니다.
가는 도중에 누군가 옆 사람과 이야기 끝에 “가느등재” 라는 말을 하길래 속으로, ‘아 저분은 경주사람이구나“ 싶었습니다.
우리가 자랄 때는 관해령(觀海嶺)이란 이름을 그냥 ”가느등재“ 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경주고에 교장으로 재직하시던 청마 유치환선생님께서 노랫말을 지으셨다는,
제 모교인 감포고등학교 교가의 첫구절은 이 재의 이름으로 시작됩니다.
”관해령 넘어서면 서라벌 옛터, 창망한 동해물을 .......“
추령재에서 장항으로 내려가는 길도 한쪽이 깨끗하게 포장이 되어 있고,
갓길도 정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걸어서 석굴암으로 가던 길목인 범실 가는 길이 보이고...... .
교각으로 된 도로 위로 늦은 밤인데도 가끔씩 차가 씽씽 달립니다.
5. 짐은 어깨를 짖누르고, 한기는 들고.......
신라의 달밤 걷기 코스의 좋은 점이라면
덕동댐 끝에서 추령재 까지의 구간을 제외하고는 차량통행이 거의 없는 구간을 걷는다는 것입니다.
또 이 지역을 통과하는 시각이 대부분 늦은 밤이므로 갓길로만 다니면 큰 위험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장항리로 올라가는 길에서 보니 기숙형 대안학교인 화랑고등학교 건물이 외등 불빛에 환하더군요.
온다 간다 말도 많던 한수원본사 건물 터닦이 공사가 한창인 장항리 입구가 30킬로미터 지점인데
학생들이 표지판에 붙어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기에 그냥 지나쳤습니다.
식당 겸 휴게소 건물 앞에서 다리쉼을 했습니다.
이때부터 한기가 들기 시작하여서 장항사지 절터까지 가는 3킬로 정도의 구간에서는 덜덜 떨면서 걸었습니다.
배낭에 든 겉옷을 꺼내 입자니 벌써부터 옷을 껴입고 땀을 흘리면 나중에 또 한기가 들 것 같았고,
귀찮아서 배낭에 넣어간 귀덮개가 있는 모자조차 꺼내기 싫어서 웅크린채 걸었습니다.
추운데다가 어깨도 아프니 처량해지더군요.
발바닥이 조금 따갑기는 해도 걸을만해서 묵묵히 고개를 숙인채 오르막길을 올랐습니다.
장항사지 절터 앞에서 주는 꿀물을 한 잔 얻어마시고나니 한기가 좀 수그러지는 듯 했습니다.
이미 오르막길을 접어들었으니 움직여서 몸이 조금 덥혀졌었나 봅니다.
토함산휴양림 앞 체크포인트에서 체크를 하고나니
그래도 반 이상을 지나왔다는 생각에 힘이 나더군요.
장항사지 삼층석탑 인근의 도로에서 꿀물을 탄 따근한 차를 공급합니다.
전기를 끌어올 수 없어 차량의 헤드 라이트 불빛을 비춰줍니다.
토함산자연휴양림 입구가 두 번째 체크포인트입니다.
대략 35-6킬로 지점입니다.
6. 아! 야속타, 40킬로미터 표지판이여,
그러나 국밥 한 그릇 먹고 기운을 내서......
가파른 길을 걸어가면서 보니 멀리 동해바다에 오징어잡이 뱃불(漁火라고 합니다)이 보이고,
아직 시간이 멀었는데도 수평선 근처가 희끔허니 밝아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석굴암 주차장이 42킬로미터쯤 되는 지점인데도,
40킬로미터 표지판은 두고 두고 나타나지 않아서 조급증이 생길 지경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앞에도, 뒤를 돌아보아도 걷는 사람이 보이지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갈래길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들어서 한참을 걸어가니 마침내 주차장 매표소가 보이고
이어서 석굴암주차장의 환한 불빛에 눈이 부셨습니다.
올해는 바람이 많이 불지 않아서 그런지 한기가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마른새우를 넣고 끓인 듯 한 시락국밥 한 그릇을 먹고나니 속이 든든하여 화장실에 볼 일을 보러 들렀더니
나이드신 두 어른이 화장실 앞 공간에서 쉬고 계시길래 옆에 끼어앉아서 양말을 갈아 신고 좀 쉬었습니다.
뜨뜻한 국밥도 한 그릇 먹었고,
바람이 없는 곳에서 10분쯤 쉬고나니 없던 기운이 생겨나는 듯 하였습니다.
화장실 입구 공간의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쉬었습니다.
7.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온다.
석굴암에서 북국사쪽으로 내려오는 약 3킬로미터쯤 되는 길은 지친 사람의 진을 빼는 구간입니다.
경사가 급한 내리막인데다가 돌계단의 높이가 높고,
알갱이가 작은 마사토라서 미끄럽기조차합니다.
이 구간을 지날 때면 물집이 생긴 발바닥은 더욱 아프고,
신발 크기가 작을 때나 지나치게 크서 발이 밀릴 때는 발가락 끝이 무척 아립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 구간을 이른 시간에 통과하면 깜깜하여 발밑이 보이질않습니다.
헤드랜턴이 꼭 필요한 유일한 구간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힘들어도
지나치게 이른 시간이 아니면 불국사 경내를 개방하여 구경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니
새벽에 한적한 불국사 경내를 가로 지르며 구경을 하였습니다.
지난 해는 너무 이른 시간에 이 지점을 통과해서
문을 열어놓지 않아 새벽에 불국사 경내를 구경하지 못해서 아쉬웠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올해는 이미 문을 열어 놓아서 구경도 하고 손각대로 사진도 여러 컷 찍었습니다.
부지런한 사진작가들이 불국사 단풍사진을 찍는다고 자리를 차지 하고 있었는데,
한 눈에 봐도 올해는 단풍이 빈약하여 '영 아니올시다'였습니다.
원래 이 연못에 비치는 붉은 단풍나무의 반영이 일품인데
낙엽 등의 부유물이 가득해서 반영을 볼 수 없어서 실망을 했습니다.
스마톤 폰으로 셀카사진을 찍으시고.......
지치고 힘들어서 잠시 앉아서 쉬고 학생들도 보이고........
코오롱호텔을 지나서.......
8. 지루하고도 지루했던 경주- 울산간 산업도로 갓길걷기
올해 코스 가운데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구간이
바로 불국사 삼거리에서 길을 건너서 통일전으로 가는 일직선 도로로 꺾어 들어가는
경주 울산간 산업도로 갓깃을 걸었던 구간일 것입니다.
지친 발목을 잡아 당기는듯한 울퉁불퉁한 보도블록도 그랬지만,
곳곳이 커브인 갓길을 걷는 동안에 대형 화물차가 질주하면서 내는 굉음에 공포를 느낄 정도였고
곳곳에 널부러져 있던 차량사고의 잔해와 흔적을 보면서
그 길을 걷는 내내 머리털이 곤두서는듯한 공포감을 느끼는 스릴(?) 있는 구간이었습니다.
마치 공포체험을 하러 간듯했던 순간 순간들을 기억하기조차 싫습니다.
신라의 달밤을 걷는 낭만적인 생각이 한순간에 달아나버리는 최악의 구간이었습니다.
걷는 내내 시선을 왼쪽으로 돌려서 지난해 들판 사이로 농로를 따라 여유롭게 걷던 생각을 했습니다.
통일전으로 가는 길로 접어드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노랗게 물든 단풍잎도 눈에 들어 왔고,
가을 걷이를 끝낸 들판도,
아직 미쳐 거두어 들이지 못한 벼가 남아 있는 논도,
하나같이 정겨운 풍경으로 다가왔습니다.
갈수록 지치고 힘은 들었지만 그래도 질주하던 차량의 굉음으로부터 벗어나서 마음은 편안해진 구간입니다.
또 하나,
혹시나 올해도 통일전 앞에서 바나나와 막걸리를 준다면
염치불구하고 두어 잔은 마시고 말겠다는 희망을 품고 고통을 참으며 걸었던 구간입니다.
불국사에서 내려 오면서 만났던,
양산에서 온 올해 처음 참가한 여학생 둘과 남학생 일행과 함께 걸어내려 오면서 이 친구들에게 농담삼아 했던 말이기도 합니다.
"힘들어도 참고 가자, 통일전 앞에 가면 막걸리와 바나나를 주는 곳이 있다.
그곳에서 눈치 살피며 막걸리를 한 잔 얻어 먹어도 괜찮다" 고 했더니 착한 이 친구들이,
"저희는 학생인데...... ." 하길래,
책임 못 질 소리였지만,
"괜찮아, 그 때 마실 막걸리는 술이 아니라 음료수니 살짝 한 잔씩만 얻어 먹어면 돼!" 하고 뻥을 쳤었거든요.
은행나무 잎이 물든 모습을 찍으려고 왔는지,
울산에서 오셨다는 찍사님들이 준대포(濬大砲)를 들이대며 찌그러진 모습을 찍으댑니다.
저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어른께 기념삼아 한 컷 찍어드렸습니다.
명함을 받고,
뒤에 사진 파일을 보내드린다고 약속을 드렸고......
이 젊은 찍사 친구는 진짜 진지합니다.
참가자의 가족인지 좋은 구도를 확보하기 위해서,
자세를 낮추어서 "엎드려 쏴!" 동작을 취하였으니 하여튼 기본이 되어 있습니다.
올해로 두 번째 참가하신다는 분입니다.
넉넉한 웃음 때문에 형님처럼 정이 가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날카로우신 눈으로,
키가 작아서 길이는 짜리몽땅해도 '한 허벅지' 하는 제 뒷모습을 관찰하시고는,
대단하다고 칭찬해 주신 고마운 분입니다.
제 동기와 후배가 관리자와 교사로 근무하는 학교인 경남 양산고의 학생들입니다.
파일을 보내 준다고 약속을 했으니,
친구의 메일로 이 파일을 보내서 대신 좀 전해 달라고 부탁해야겠습니다.
사진 속의 이 분들은 자세(?)로 봐서 걷기나 산행경험이 많은 분인듯 합니다.
한 마디로 자세가 나옵니다.
카메라를 들이대시길래,
저도 장난삼아 카메라를 들이댔습니다.
바나나 두 쪽을 먹고나서 막걸리를 종이컵에 세 잔이나 얻어 마시고
든든하게 길을 나섰더니
우리 경상북도 학생의 호연지기를 기르는 화랑교육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화랑교육원에 이웃하고 있는 경상북도산림환경연구원입니다.
오래 전 학창 시절에 저를 무척이나 따랐던 후배가 근무하는 곳이라서 이 앞을 지나갈 때마다 예사롭지 않습니다.
배동 강둑을 따라서 걷는 구간입니다.
이 둑길을 건너오기 전에 체크포인트에서 땀에 젖은 체크 카드를 꺼내서 세 번째 스탬프를 찍었습니다.
박물관이 왼쪽에 보이는 59킬로미터 지점쯤입니다.
이곳에서 지친 아이들을 응급처치하고 도와주신 포항에서 온 연세 지긋하신 사람 좋으신 두 내외분들을 만났습니다.
기념으로 사진을 한 장 찍어드린다니 사양하셔서 많이 아쉬웠습니다.
9. 결승지점으로 가는 길에 마지막 힘을 내서......
해는 이미 중천에 올라와 있었고,
다리는 붓고,
발바닥은 따가웠지만,
완보를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길이라서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고통의 순간을 스스로 이겨냈다는 만족감이 충만했던 때입니다.
' 아! 이제 고생이 막바지에 이르렀구나' 싶었던 60킬로미터 지점입니다.
박물관 주차장 근처입니다.
경주 사람은 아니지만 경주를 누구보다도 사랑하셨던 고청 윤경렬선생님 기념비입니다.
경주지역의 문화재 이야기를 하실 때 목소리가 청아하셨던 고청선생님의 행적을 옮겨 적어 봅니다.
1999년 11월 30일에 경북 경주에서 일생을 마치신 향토사학자이시자 풍속인형제작자이십니다.
신라 문화에 매료되어 1949년 경주에 정착한 뒤
한국인의 얼굴과 풍속을 기초로 인형과 기념품을 만들고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를 개설하는 등 한국 문화를 찾고 가꾸는 데 평생을 바치셨습니다..
1943년 개성에 고려인형사를 차리고 단청 수업을 받았으며
당시 개성박물관 관장이던 고고미술학자 고유섭, 화가 오지호 등을 만나면서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또 통일신라시대 유물이 고구려·백제·가야 등 우리 겨레의 지혜가 뭉쳐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하고
경주로 삶터를 옮기기로 결심하시고,
1949년 경주에 정착하고 이후 50년 동안 경주시 인황동에 살면서 신라문화를 재조명하는 데 일생을 바쳐,
밝고 힘찬 한국인의 아름다움이 담긴 토우를 만들겠다는 다짐과 함께 인형공방 고청사(古靑舍)를 설립해 기념품을 제작했으며
경주에 있는 계림초등학교와 근화여자중학교에서 미술을 지도하기도 했습니다.
1954년 엄대섭 및 당시 국립경주박물관 관장 진홍섭과 함께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를 개설해
20여 년 동안 매주 1차례 수업을 진행하였고,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를 개설하여,
"문화재의 참뜻을 가르치는 동시에 우리 겨레의 아름다움도 가르쳐 미술 공예 부문의 인재를 길러내자"는 뜻을 펼쳤습니다.
1971년에는 경주 지역의 문화애호가들과
'어린이향토학교 뒷받침회'를 결성해 〈석굴암이야기〉·〈불국사이야기〉 등 교재 25권을 펴냈으며,
그밖에 한국의 아름다움과 신라의 미에 대해 수많은 강연을 해왔으며 1956년 신라문화동인회를 창립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불교문화의 보고인 경주 남산을 가장 많이 오른 향토사학자로 알려져 있으며,
1975년부터 부인과 함께 본격적으로 조사를 시작해 남산의 절터와 부처를 찾아 골짜기 곳곳을 답사했으며,
1977년 여름 2년 반 동안의 조사결과를 책으로 펴냈습니다.
경주시에서 일어판과 영어판까지 제작한 〈경주 남산 고적 순례〉(1979)와 〈경주 남산〉(1989)을 발간했고,
그밖에 〈불교동화집〉(1965)·〈신라이야기〉(1981)·〈신라의 아름다움〉(1985)·
〈겨레의 땅 부처님 땅〉(1993)·〈경주남산의 탑골〉(1995) 등의 책을 통해 신라문화를 널리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자전적 에세이 〈마지막 신라인 윤경렬〉(1997)에서 그는,
"내 평생의 보람된 일은 우리의 풍속 인형을 만든 일과 경주 남산을 조사하고 소개한 일,
그리고 경주의 어린이들에게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과 자긍심을 가르친 일"이라고 회고하셨습니다.
(브리테니커백과사전에서 일부를 옮겨서 편집하였습니다)
봄이 와서 꽃이 피면 온천지를 노랗게 물들일 유채가 심어진 곳입니다.
지난해까지는 바로 첨성대 옆을 지나갔었는데,
올해부터는 반월성으로 접어드는 길로 코스가 조금 변경되었습니다.
불국사 삼거리에서 구불구불한 들길로 가는 대신에 산업도로 갓길로 걷는 코스로 바뀌면서
모자라는 거리를 보충하는 의미인듯 합니다.
드라마 "선덕여왕" 촬영지라는 안내판이 보이고.......
왕실에서 무더운 철에 쓸 얼음을 겨울철에 채취하여 보관했다는 석빙고입니다.
계림 숲을 지나고......
첨성대를 지나서......
천마총으로 접어든 길,
여전히 무겁고 지친 발걸음을 옮기며 마지막 체크포인트로 향해 가고.......
대능원(천마총)을 지나서.......
노서, 노동동 고분군 사잇길로 시내 중심가로 향해 가는 중입니다.
노서동 금관총입니다.
노동동 봉황대입니다.
경주시내 중심가의 상가 지역에 진입했습니다.
10. 이 순간을 위해 오랫동안 걷고, 뛰면서......
가까스로 결승지점에 도달한 이 순간의 얼굴 표정을 보면,
하룻밤 사이에 몇 년은 늙어버린듯하지만,
그 누가 알리요,
이 가슴 뿌듯함을.
고통은 순간이요, 지나고 나면 그저 아름다운 추억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힘들었던 일을 다 잊고는 다시 또 도전하는가 봅니다.
결승 지점에서 잔뜩 찡그린채로 완보 기념 촬영 하였습니다.
이 때 시간이 11시 27분쯤이었습니다.
함께 165리 신라의 옛길을 걸었던 모든 분들과 주최측인 경사모 회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지나간 우리 삶은 한갓 추억일 뿐이지만 기록할 때 가치가 있다고 믿으며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 글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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