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두만강

2008. 6. 26. 09:03글 소쿠리/붓가는대로 쓴 글

 아버지와 두만강

 

  아버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두 해가 지났다. 당신보다 한 해 먼저 땅속에 묻히신 어머님을 따라 이승을 떠나신 때가 지지난 해 늦가을이었다. 집 담벼락의 시멘트 블록 사이에 겨우 몸을 끼워서 버티던 감나무 이파리가 붉게 물들어 거의 다 떨어지고, 골목을 휘돌아오던 아침 바람이 뼈 속으로 스며들던 때였다. ‘살아서 언젠가는 고향 땅을 다시 밟아보시리라’ 던 기대를 가슴에 안고 피붙이 하나 없는 남녘 땅 포구에 발붙이고 남들의 입초시에 늘 오르내리면서도 질경이처럼 끈질긴 삶을 이어오신 아버지이셨지만 뜻밖에 당하신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신 셈이다. 적어도 내가 자란 포구에서만큼은 ‘이북내기’라는 경멸에 가까운 호칭이 아버지의 이름 석 자보다 사람들에게 더 알려져 있었으며,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는 아이들조차 우리 집에 놀러오길 꺼렸고 아버지를 보면 무슨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실실 피해 다니기도 했었다. 읍내 중심가인 육거리에서 반공 궐기대회라도 있는 날이면 아이들은 같이 간 나를 외계인 취급을 하듯이 힐끔거리곤 하였다. 비교적 나하고 친하게 지내던 한 친구조차도 우리 가족이 저희들보다 공산주의자들 때문에 더 큰 피해를 당하고 산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 하였다.

  평소에는 몸소 개간한 땅에서 밭농사 일이나 과수원을 돌보는 일만 묵묵히 하실 뿐 말수가 적으신 아버지이셨지만, 오랜만에 몇 안 되는 고향 사람들의 큰일이라도 다녀오시면서 약주를 한 잔 잡수신 날에는 오랫동안 접어 넣어 두셨던 사진첩을 펼치시듯 당신의 뇌리 속에서 유년기의 기억들을 끄집어내셔서 우리 형제들에게 밤을 새워 이야기를 해 주시곤 했다. 당신이 태어나신 회령땅에서 두만강을 건너 간도의 도문까지 장을 보러 다니셨다는 대목에서는 어린 나의 가슴속에서 휴전선은 지워지고 먼 만주나 간도까지로 우리의 영토는 넓어지고 한번도 뵌 적이 없는 내 선대의 모습이 머릿속에 선연하게 떠오르곤 했다.

  칠십 년대 초에 남북 교류의 물꼬가 트일 기미가 보였을 무렵에는 쉰을 넘기신 당신의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해지셨지만 당장에라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처럼 서두르셔서 어머니와 우리 형제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집을 떠나서 먼 고장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무렵에 한국방송공사에서 이산가족 찾기를 시작했었다. 연일 부둥켜안고 세월을 잊은 채 통곡하던 많은 사람들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면서 남모르는 눈물을 많이도 흘리셨고, 그토록 열성적으로 돌보시던 농사일도 거의 손을 놓으신 채로 밤을 새워서 한숨을 쉬셨다고 명절 때 고향에 간 나에게 어머니께서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 때만해도 전화 사정이 좋지 않을 때인데도 교환의 중계에 도움을 받으면서 내게 텔레비전을 꼭 보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내 숙소에는 텔레비전이 없어서 학교 숙직실에서 화면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흑백텔레비전을 보면서 나도 참 많이 울었다. 혹시 옛 주소가 회령 쪽인 이산가족이 나오면, 말로만 듣고 한번도 뵌 적이 없는 내 일가친척인가 하고 화면 가까이 다가앉기도 했다. 자세한 우리 집안의 내막을 모르는 동료들이 웬 눈물이 그리도 많으냐고 물어왔을 때는 그냥 웃어넘기기도 했다.

  몇 년 전 봄에 대구 시민회관에서 일본의 사진작가인 쿠보다 히로찌의 사진전이 열렸을 때 장대한 두만강 유역의 사진을 보면서 강기슭의 모래 더미 위에서 웃고 서 있는 스무 살을 갓 넘긴 청년의 환상을 느끼면서 오랫동안 그 사진 앞에서 떠나지를 못했었다. 그 사진 속의 강 한복판에는 나룻배가 한 척 떠나고 강기슭에 서서 손을 흔드는 내 아버지의 젊은 날의 모습이 뚜렷이 보이는 듯했다. 살아생전에 자식의 손을 잡고 고향 땅을 밟으시리라던 아버지는 한 해 먼저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와 나란히 남녘에 포구 기슭에 누워 계신다.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병약하신 몸으로 이제는 빛이 바랜 사진처럼 희미해진 기억을 윗대 어른들의 산소 위치를 한 곳 한 곳 일러주시고는 돌아누우셔서 눈물을 흘리시던 내 아버님, 이제 고향을 떠나실 때의 아버님 나이보다 여남은 살이나 많이 먹은 자식의 기억 속에 두고 온 혈육의 정을 이어 주려던 그 분의 노력 탓인지 한번도 가 본적이 없고 한번도 뵌 적이 없는 그곳과 혈육의 모습이 나의 뇌리에도 선명히 박혀 있다.

  먼 나라에서는 두터운 장벽이 무너진 지 오래되었고 언젠가는 견고한 휴전선도 걷어지겠지만 그것보다 먼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높고도 높게 쌓아 놓은 불신의 벽을 허문다면 분단의 세월이 조금이라도 짧아지리라.

  이번 가을에는 저 쪽과 이 쪽의 사람들이 교류의 물꼬를 조심스럽게 트고 있다. 아직은 미미한 물줄기지만 언젠가는 도도한 흐름으로 굽이치는 두만강의 물줄기처럼 막힌 장벽을 허물고 통일의 그 날이 오면, 아직은 혈육의 정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는 어린 내 자식의 손을 잡고 아버님의 고향으로 달려가리라. 두만강 맑은 물을 초롱에 담아 와서 아버님 무덤가에 흠뻑 뿌려드리고 영혼이나마 천리 길을 훨훨 날아가서 그리운 부모 형제들을 만나게 해 드리리라.

  오후에는 세 살짜리 아들 녀석의 손을 잡고 아버님 무덤으로 찾아가서 즐겨 잡수시던 약주라도 한잔 올리고 통일 축구 이야기라도 들려드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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