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6. 25. 15:20ㆍ글 소쿠리/붓가는대로 쓴 글
수업을 하다가 가끔씩 쳐다보는 온 산에 가을 기운이 완연하다.
주말인 어제 오후에는 이곳 울릉도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성인봉에 올라갔다가 해가 지고 어두운 산길을 혼자 내려왔다.
어둠이 곱게 깔린 조용한 산길을 혼자 내려오는데, 부엉이 한 마리가 산책로 표지판 위에 앉아서 눈을 깜박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처음에는 좀 놀랐고, 이 녀석도 놀랐는지 날아갈 생각도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한참 동안을 그렇게 서로 마주 쳐다보고 난 뒤에 사진이라도 한 장 찍으려다가 주위가 너무 어두웠고 또 놈을 놀라게 하는 것은 실례가 될 것 같아서 그냥 지나쳐왔다.
나중에 한참 더 내려와서 어둠 속에 서 있는 간판을 보니 방금 지나온 곳이 야생조수 보호지역이던데 아마 그런 야생 조류들이 많은가 보다.
산길을 내려오는 동안 살찐 꿩들이 떼로 몰려다니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이틀 전에 바닷가에는 비가 내렸는데 산꼭대기에는 군데군데 눈이 쌓여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대원사 코스는 봉우리의 북쪽 경사면에 해당하므로 철 아닌 눈이라도 내리면 내년 봄까지 곳곳에 눈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산꼭대기에 있는 나무는 이미 잎이 다 떨어졌지만 산 아래로 내려오면서 보니 잎 넓은 나무들은 아직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었다.
먹는 물이 양껏 흐르는 신령수라는 시원한 샘을 지나면서부터는 바닥이 부드러운 흙으로 된 길인데 키 큰 관목 사이를 통과하는 길이라 운치가 있어서 몸은 솜뭉치처럼 무거웠지만 내려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혼자 걸어내려 오면서 노래라도 부르고 싶었지만 고요한 가운데서도 숨막힐 듯 움직이는 자연의 질서에 어긋나는 것 같아서 그냥 왔다.
산길을 오르고 내려오는 동안에 늦가을에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온 제자 아이 생각을 했다.
이미 몇 달 전에 반가운 결혼 소식을 전한 제자 아이는 나를 주례로 모시고 싶다는 요청을 해왔다. 그
러면서 내가 나이를 핑계로 사양할까봐 나이나 지위를 따지지 않으니 그런 이유 때문에 거절하지 마시라는 다짐을 함께 보내왔다.
나이도 아직 젊고 사회 경험도 부족한 내가 새 출발을 하는 이 부부 앞에 주례를 서는 일이 망설여지지만 고향에서 근무를 할 때 담임을 맡았던 이 아이들과 오랫동안 쌓아온 정이 두터워서 물리치기가 쉽지 않았다.
고향의 모교에서 근무를 하던 때이니 처음 만난 것이 10년이 훨씬 지났다.
신랑이 될 사람은 졸업을 한 뒤에도 명절 때마다 여럿이 모여 우리 집에 놀러 온 제자들 가운데 한 명이다.
형제가 없어 외롭게 자란 나는 명절 때 집안에 손님이 북적대는 이웃의 다른 집을 보고 부러워했는데 많을 때는 서른 명 가까이 되는 제자들이 몰려와서 북새통이 된 것은 물론이고 준비한 명절 음식을 모두 바닥내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아랫동네의 가게로 마실 거리나 안주거리를 사러 가면서도 흐뭇했던 기억이 새롭다.
초등학교에도 다니지 않던 어린 내 자식들도 이 아이들이 오면 쓸데없이 방을 들락거리며 얼굴을 익히려고 했으니 우리 가족과도 정이 많이 들었다.
집안 형편이나 성적 때문에 제자들 가운데 겨우 몇 명만 대학에 진학을 했지만 우리 집에 모이는 날이면 대학생이든 군인이든 실업자든 회사원이든지 혹은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지 서로 흉허물이 없는 친구로 웃고 떠들어댔다.
어떤 때는 아예 우리 집을 중간 연락처로 삼아서 모이고 저희들끼리 만나자는 연락을 하기도 했다.
명절 뒤에 군대에 가거나 하는 아이들이 있으면 환송연을 하는 자리이기도 했고 제대를 하면 신고식을 하는 자리가 되기도 했다.
명절에 맞춰 휴가를 나온 육군과 해군과 의경과 단기 사병이 한꺼번에 만나기도 했고 부사관과 졸병이 거리낌 없이 너 내하고 어울리는 자리가 되기도 했다.
취업의 고민을 이야기하기도 했고 다음에 결혼 할 것을 염두에 두고 이성을 만난다는 고백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여자아이들이 나이가 차서 하나 둘 결혼을 한 뒤에도 명절 때 친정에 와서 안부를 묻고 친구들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이런 일이 내가 고향을 떠날 때까지도 이어졌고 그 뒤에도 결혼식장에서 만나거나 안부 전화를 하거니 시내의 우리 집에 찾아오는 고마운 정성을 보이는 경우도 있어서 좋은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특히 신랑이 될 이 친구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 갑자기 부친이 돌아가셨고 남겨진 빚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는데 굳건하고 성실한 성품이 남달라서 내가 무척 아끼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찌감치 지원을 하여 서울에서 의경 생활을 마치고 학교에 다니거나 나이가 적은 다른 친구들이 아직 군대에 가지도 않을 때 이미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신랑이나 신부가 될 사람이 근무하는 직장의 상사도 있고 주변에 덕망이 있는 다른 어른들이 많이 계실 텐데 하필 먼 섬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아이처럼 철없이 살고 있는 부족한 내게 그런 부탁을 해 왔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고민이 적잖이 되었지만 제자 아이의 제안은 혼자 등산을 할 때마다 조용히 지난 시절의 내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지금껏 살아왔는가 하는 자신에게 던지는 물음과 살면서 저지른 크고 작은 잘못 때문에 남에게 바른 길로 가라는 이야기를 하기에는 부끄러운 기억은 또 얼마나 많은가하는 반성의 계기가 되었으니 틈만 나면 그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혼자 지내는 섬 생활의 외로움을 견디어 내려고 지난봄부터 달리기를 시작한 이후로 몸의 살이 많이 빠지고 본래 새까만 얼굴이 살이 빠져서 더 엉망이 되었으니 남들 앞에 그것도 주례로 나서기가 망설여졌다.
오래 전에 정중하게 하던 부탁을 거절하자니 미안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지만 일생에 한 번이나 맞이하기도 힘이 드는 좋은 기회임은 분명하였다.
가을이 시작되기도 전에 울릉도의 가을을 실컷 담고 싶다는 욕심을 부렸는데 촬영이 제대로 된 것인 지는 현상을 맡긴 필름이 도착해봐야 알 수 있지만 산 위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은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확 트이니 굳이 필름에 담지 못해도 수고 한 것보다는 넉넉하게 안고 온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보니 섬의 북쪽인 천부 앞 바다에는 오징어를 잡는 배들이 켜 놓은 불빛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불빛을 보고 몰려오는 특성 때문에 배마다 수천 촉광의 불을 켜고 오징어를 잡으니 멀리서 보면 장관이지만 배 위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시력을 앗기고 얼굴이 온통 검게 타기도 한다고 하니 남의 고단한 삶도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아름답게 보이는 이치가 이곳 섬이라고 하여서 크게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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