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드로바를 즐겨 신는 사내의 헛기침
2008. 6. 25. 16:58ㆍ글 소쿠리/자작 시 모음
랜드로바를 즐겨 신는 사내의 헛기침
우리 사무실 현관에는
석자 이름을 대신한 두 자릿수 고딕체 아라비아 숫자가
수인번호처럼 씌어 있는
쉰 여섯 개의 입을 벌린 신발장이 있지요
근무하는 쉰 세 명의 키를 무시한
봉급 액수 순서지요
내 번호는 이십 오번
가로로 일곱 줄
세로로 여덟 칸 가운데서
네 번째 줄 네 번째 칸이지요
어느 토요일 아침 늦은 출근길에
밤새 마신 술로 뒷골이 욱신거릴 때,
번번이 금요일마다 어김없이 술에 곯아떨어지는 불길한 징크스와
술집 계집 유대의 능글맞은 웃음이 겹칠 때
사(死) 자에 대한 은밀한 두려움이
해일처럼 한꺼번에 밀려왔고
배반처럼 세차게 고개를 저었어도
나는 끝내 네 번째 줄 네 번째 칸에
뒤축이 삐뚜름한 내 신발을 넣지 못한 채
출입문 밖을 내다보며 헛구역질을 해댔지요
이년이나 신은
물 날리고 온갖 때 낀 내 신발은
주인의 갑작스런 변심에 놀라 내 손에 안겨들었으나
징그러운 벌레인양
그대로 바닥에 팽개친 채
사무실 안으로 뛰어들었지요
정확히 백 네 개의 눈
끽끽한 미닫이 출입문 소리에 놀란,
건조한 시선들이 내 얼굴에 표창처럼 꽂혔어요
회의 중이었어요
날마다 치르는 엄숙한 의식
더 붉힐 것이 없는 열띤 얼굴로 외면하며
깊은 침묵의 늪 속을 더듬어갔지요
두어 번 헛기침을 하면서
'글 소쿠리 > 자작 시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성식당에서 (0) | 2008.06.25 |
---|---|
동해남부선, 기억 속의 길을 가다 (0) | 2008.06.25 |
불면증 (0) | 2008.06.25 |
섬에서 쓰는 편지 4 (0) | 2008.06.25 |
시작화면 (0) | 2008.0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