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사진을 찍었었지

2008. 6. 25. 15:54글 소쿠리/자작 시 모음

 

흑백사진을 찍었었지


밤샘 공부에 눈이 붉어지던 나날

꽃잎이 펴도 져도 그냥 쳐다만 보다가 보낸

봄이나 여름은 차라리 짧았었지

햇살이 같잖게 쏟아지던 어느 가을날 오후

이른 아침부터 까닭 모르고 갇혀있던

튼튼한 창틀 속 학교에서 몰래 빠져나와

숨어 든 바닷가

굵은 바람을 삼켰다가 토해내는

허리 굽은 소나무 밑둥치 사이로

발목을 잡고 흔드는 붉은 언덕을 지나

바위가 버티는 그늘진 사이사이

용케도 발 밑에 이어지던 길

이윽고 방파제 입구에 이르면

바다가 삼켰던 바람을 내뱉는 쿠르릉거리는 숨가쁜 소리

놀라 눈을 감고 바다를 향해 누워있는 방파제 등을 밟고 뛰었지

부풀던 가슴 안에

터질 것처럼 팽팽한 숨을 밀어 넣으며

심심한 하얀 등대 앞에서

모서리 닳아 낡은 사진기의

흐릿한 렌즈 속에 뛰어 들어

검은 필름 속에 겁도 없이 박히던

벗어나고만 싶던 시절

철이 없어 아름다웠고

이제는 더 그리운

검은 교복의 열여덟 흑백시절


밝은 빛살 아래 푸른 소나무 여전히 웃고  서 있고

붉은 등대 선명한데도

기억 속에는 늘 흑백인 그 날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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