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6. 17. 18:56ㆍ글 소쿠리/자작 시 모음
영양통신 - 2000년 늦가을, 길라잡이
붉은 신호가 자주 발목을 잡습니다
등을 떠미는 푸른 신호들을 피해 달아나는 앞에는
나란히 공중에 매달린 과속 감시 카메라가 불경스럽게 눈을 부라립니다
이만 가지 부품을 모아 만든 최신형 승용차로도
마음놓고 달리는 것이 쉽지 않은 칠 번 국도를 타고
공사장 주의 표시 사이로 오느라 신경 줄이 팽팽하여 견딜 수 없이 피로하면
강구를 지나 오십천 둑 옆 길 가 빈터에 잠시 쉬면서
섞은 생선 창자 구걸하다 제 철에 바다로 떠나지 못한
갈매기 후회하는 피곤한 날개짓을 보다가, 울음소리 듣다가
억새 뿌리 붙잡고 흐르는 얕은 강 위를 건너
영덕 읍내 버스 정류장 뒤에서 서성거리다 왼쪽을 끼고 돌아
늙은 짐승처럼 어슬렁대는 큰 내를 따라 내내 올라오세요
유혹의 붉은 사과를 등처럼 무겁게 달고 서 있는 안개 속 낮은 산자락에는
나이 든 나무들 잡초 속에 허리 낮추고 웅크리고 서서 날마다 하늘만 올려다봅니다
윤기 도는 붉은 살결의 복숭아나무들
이미 오래 전부터 잎을 훌훌 벗고 잔가지 끝에 타는 욕망 달아 올리고
돌아올 봄꿈에 취한 채 바람에 건들거리며 서 있고
참 곱게도 단풍 물든 이파리 몇 개 아직 힘겹게 붙어 있는 배나무가 곁에 서 있습니다
강물을 퍼 올려 아침마다 바람에 널고 있는 골짜기 안개는
이제 돌아가야 한다고 날마다 강바닥 돌아보고 있지만
무서운 기세로 온갖 쓰레기 몰고 왔던 물이 먼저 바다로 숨어버리고
여름에 남겨둔 것들 널린 그대로 아직 남아 있지만 쉽게 떠나지 못합니다
마을 앞 길가에는 밭일에 지친 검은 얼굴의 여인들이
여전히 제 철이 지난 끝물 과일을 팔고 있습니다
무너진 밭둑 위 퍼렇게 언 무청이 고개를 내밀다가 낯 선 그대의 눈 끝에 숨을지라도
돌아보지 마십시오, 눈을 굽은 길 위에 그대로 둔 채 고개를 오르면
억지로 깎인 산비탈 아픈 속살 드러난 곳마다
습관처럼 무더기로 쏟아져 내리는 흙더미
산그늘이 닿는 곳마다
모래 무더기들 비닐 옷을 입고 모여있고
작은 것들은 늘 이렇게 습관으로 모여 있다가
눈이라도 내리면 차바퀴에 깔려 신음소리를 냅니다
황장재 휴게소 맞은 편 산자락에는
낙엽들이 골짜기로 모여 벌거벗은 나무 발아래 앉아
낮은 소리로 수런거립니다
창문을 내려 굳이 들으려 하지말고 외면하세요
가을 이 길에는 소리로 듣는 것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 더 가까이 있습니다
이곳으로 돌아오는 길 구비마다 버드나무 숨김없이 곧게 서 있다가
해거름에는 그림자 되어 길 위를 가로질러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갑니다
소금기 바람에 실려오다 높은 재 머리에 걸려 이곳 내륙에는 무서리가 맵게 내리지요
굽이도는 길을 걷느라 후들거리는 걸음대신 흔들리는 운전대를 힘주어 잡고
거침없어 두려운 내리막길을 따라
길가 초라한 음식점 몇 있는 신촌을 지나면서
약수로 거북한 속 채우고
산의 자궁 속으로 들어오는 월전 삼거리 오른쪽 돌아서면
선명하게 붉은 고추 두 개가 간판 속에 맵게 열려있는 영양입니다
길가 가파른 바위 벼랑에 늦은 가을꽃 손이라도 흔들거든
그대 곁을 떠나온 다섯 해를 키워온 내 그리움인양
희열에 들떴던 첫 밤의 미련인양
골짜기 바람 되어 사라진 복원 불가능한 우리 옛사랑인양 여기시고
뒤돌아 보아버려서 기어오르다 멈추어 버린
늘 서 있는 바위
전설 속의 그리움은 바위로 남아 있고
반변천 나무 그림자를 타고 놀던 낮달
물에 젖어 일어서지 못하고
날마다 온 길을 되돌아서 그리움 빠져있는 그 바다로 가는데
말없이 지켜만 보는 내 마음 같은 산
그 속에 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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