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서 띄우는 편지

2008. 6. 17. 18:23글 소쿠리/자작 시 모음

    바다에서 띄우는 편지


      1 - 오징어의 시각

   칼을 잡은 당신의 손은 거침없이 제 운명을 갈랐지요. 나는 겨우 한번 꿈틀거렸을 뿐

  거머잡은 거센 손길에 놀라 기어오르던 빨판에 힘이 빠졌어요. 몸뚱이와 분리된 눈은

  눈물도 없이 그대 손에서 뭉클거리니 갑자기 세상을 볼 수 없었어요.

  애초에 물 속에서나 익숙했던 눈이었지만 당신보다 훨씬 둥글고 넓게 세상을 보던

  어안(魚眼)이었는데 아무 소용이 없어요, 이젠.

      2- 달에게 보내는 게의 호소

    그대가 환하게 웃으면 이유도 없이 살이 내립니다. 날마다 야위어 가는 내가 바라보는      

   그대의 웃음은 여전히 푸릅니다. 어두운 바다하고도 속, 깊은 곳에서조차 바닥을 기어야

   하는 숙명은 받아들일지라도 내 마디진 손가락이 아프게 바위를 긁으면서도 그대를 향한    

   나의 촉수를 거두지 못합니다. 단단한 각질의 대쪽같은 껍질 속에 감춰진 내 살이 내리는 것을 

   남들은 모릅니다.

    속에 있는 살이 내릴수록 껍질은 더욱 단단해져서 그대의 서러운 웃음이 그리워 눈이 멀어 

   질 때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간 그대의 푸른 얼굴을 잊습니다.

    햇볕에 바랜 해초의 모습처럼 그대 얼굴이 희미해지면 또 보름이 물살처럼 흐릅니다.

   내 살이 내리면 그대는 살이 오르다가,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그대도 살이 내려 보일 듯     

   말 듯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고 지친 나는 다시 또 욕심스럽게 살이 오릅니다.

      3- 광어의 하소연

    비록 바다 밑을 기어다니나 한 눈은 팔지 않습니다. 그대를 향한 그리움을 견디려고 날마다  

   모래에 닦은 내 가슴살은 점점 얇아져서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생존에 필요한 지느러미   

   까지도 닳아지나 살아야 하겠기에 힘들여 다시 키웁니다. 자존심이 뚜렷하게 등뼈로 버티는  

   내 몸에 닿는 당신의 관심은 희미합니다. 먼 곳을 다니지 못하는 내 시야는 점점 좁아져서   

   오로지 당신을 향해 열려 있지만,

    내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대여

    바다 속이 아닌 곳에서 나를 만나거든 그 곳이 수족관이든, 고무통 속이든 내 눈을 보세요.

    입 속에서 가만히 소리 내어보세요.

    그리고 기억하세요.

        광.어 - 왼.쪽

        도.다.리 - 오.른.쪽

       4- 복어의 변명

    내가 뭐 혼자 살자고 숨겨놓고 따로 먹은 것도 없어요. 본능적으로 품은 맹렬한 독기를     

   아가미에 감추고 있을 뿐입니다. 사는 것이 고달파서 적당한 눈속임과 자잘한 변명이 습관으로

   배었으나 단단히 이를 악물고 삽니다.

    나를 볼 때는 얼굴을 먼저 보세요.

    아랫배로 내려오는 당신의 탐욕스런 눈길은 견디기 힘들어요. 술에 절은 당신의 눈이나 쓰린

   속은 내 탓이 아니라 또 다른 당신의 습관 때문입니다. 내게 남아있는 이 자존심도 한껏

   부풀어올랐다 힘없이 줄어듭니다, 위험을 느끼는 물 밖에서는.



'글 소쿠리 > 자작 시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양통신 - 2000년 늦가을, 길라잡이  (0) 2008.06.17
사과를 씹으며......  (0) 2008.06.17
시골 버스 운전사의 독백  (0) 2008.06.17
갈수기(渴水期)  (0) 2008.06.17
날마다 갉아야 살 수 있는 삶  (0) 2008.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