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갉아야 살 수 있는 삶

2008. 6. 17. 18:15글 소쿠리/자작 시 모음

 

날마다 갉아야 살 수 있는 삶



녹색의 힘, 네가 지배하는 세상

도드라진 힘줄로 버티는 이파리

모공이 고르게 깔린 뒷면은 우리들이 사는 땅


인정을 무시하고 거칠게 사는 것은 멋진 일이지만

너를 없애야만 살 수 있다는 타고난 운명이 슬프다

녹색의 알로 태어나 숨죽이며 붙어있던 엿새 동안

교묘한 위장의 숨막히던 순간이 지나고

유충으로 기어다니며 날마다 몸을 키울 때

아무리 먹어도 물리지 않는 억센 탐욕에 빠져

세상의 푸른 것은 남김없이 모두 먹어치우겠다고 설치던

내 투지가 무너지던 날

흔적을 많이 남겼다는 두려움을 이기려고

허물을 벗어 화려한 껍질을 두르고 세상 속에서 나를 건져낼 수 있었다


지배하는 자와 맞설수록 봄 풀잎처럼 자라던 날개

연한 날개를 키우는 긴 시간 동안

욕망으로 헝클어진 신경을 가름하며 버티면

어둠 속에서 만질 수 없는 너의 손 여전히 힘차게 뻗치고

할 수 있는 일과 하지 못하는 일

알 수 있을 만큼 긴 세월을 자양으로 버틴 단순한 삶


눈부신 하늘을 날아오르려고 몸 안의 열기를 밀어내어 날갯짓하는 내 눈앞에

세상의 모든 풀잎들 유혹의 손사래치고

바람은 날마다 불어 내 날개 미세하게 부수어졌지만

잘디잔 가루가 되기 전에 흰 기억으로 먼저 눈 속에 남았고

또 긴 시간을 기억의 뿌리에 머물며 번데기로 숨어 지내는 동안

변화를 노리는 힘을 키웠다


봄날, 눈뜨고 세상에 나오면

복원된 기억은 다시 천지를 덮고

눈앞의 세상은 갉아도 여전히 녹색

바꿀 수 없지만

인정할 수도 없는 현실

날마다 되풀이되는 내 본능적인 삶에 취해

겁도 없이 부딪히는 세상

부드러운 혀 감추는, 늘 부는 바람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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