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6. 17. 18:03ㆍ글 소쿠리/자작 시 모음
안드로메다좌에 있는 사람에게
기차는 움직이지 않고 늘 역에 서 있다
불이 켜진 기차 위로 떠돌던 별들이 무더기로 쏟아진다
소행성으로 가는 기차의 짧은 객실에는 외계 도시의 사내 몇이 앉아 술을 마시고 있고
연인들 혹은 친구들끼리 둘러앉아 색색의 분말이 녹아있는 다양한 취향의 음료수를 마시고 있다
행성으로 가는 기차는 등급이 없어
처음 타는 승객들은 당황하지만 이내 배분된 공간에 익숙해진다
타는 순서대로 골라 앉을 수 있는 자리는 외계에서의 역할과는 무관하다
행성에서 먼 이곳 도시의 길 위에는 마른 바람이 일고 있어
사막에서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의 몸에서도 마른 모래 냄새가 난다
가로등이나 시멘트 틈에서 빠져 나와 어둠 속에 떠 있던 불빛들이 달빛이 닿지 않는 빈곳을 채운다
떠도는 빛들은 입자가 고르다
어느 곳이나 고유한 언어의 질서가 있어 낯선 사람들이 낯설어 하듯이
행성에서도 지켜야할 질서가 있다
바깥과 단절된 행성에서 외계인이 할 수 있는 말은 단 한마디뿐이다
가․능․성
푸른 별에 사는 당신의 사전에 있는 수십만의 검은 어휘들은 쓸모가 없다
행성 밖 도시에서는 외로운 말들이 쉽게 짝을 짓지만 행성에서는 불가능하다
-가․능․성- 이란 말이 유일한 언어인 그곳에서도 불가능한 상황만 있어
어울려야 쓰임새가 있는 말들이 외롭게 혼자 돌다 그냥 사라진다
-사.랑-이 -합.니.다-와 은밀하게 짝을 지어 눈물을 낳고,
-나.는-과 -그.대.를-이 눈물에 덧붙여지면 아픔이 생기지만
공간이 좁은 행성에서는 새로 생기는 것들이 모두 축복 받지는 못한다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제한된 그 곳에서 그대가 입은 옷의 색채는 식별부호로 존재한다
그곳에는 -검.은 옷.을 입.은 그.대-와
-붉.은 옷.을 입.은 마.주 앉.은 다.른 사.람-이 있다
행성의 주위에는 빛이 모자라지만 인력의 지배를 받는 행성들은 서로가 갖고 있는 빛을 나누어
가령 외계의 도시 사람들이 말하는,
별.빛, 꿈, 희.망 따위의
한 음절 또는 두 음절로 이루어졌으나 가슴에 담아두기는 벅찬 말들을 만든다
움직이지 않는 기차 주변에 마른 바람이 불고 외계로 가는 길로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
아름다운 것들이 모두 낯선 들판이나 산 너머로 떨어지는 계절이다
행성으로 가는 기차를 날마다 타지만 중력의 지배를 받는 나는 결코 행성에 닿을 수 없다
기차에서 내려 선회하는 별똥 하나 눈에 담고 서 있으면
철길은 어둠 속에서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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