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치기

2008. 6. 17. 19:07글 소쿠리/자작 시 모음

 

가지치기


햇살 매끄러운 이른 봄날

사다리 꼭대기에 올라서서

물이 덜 오른 나무의 가지를 친다.

넘쳐 진저리나던 여름날의 비나

가을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미리 떨어져 버린 익다 만 열매와 잎

허리를 꺾으며 겪어낸 찬바람 불던 세월

모두 잘라내야 할 기억의 가지로 남아

묵었거나 마른 가지와 함께 잘라내야 하지만

가끔씩 희망의 싹을 품은 잔가지도 실수로 함께 잘라내어 안타깝지만

되돌릴 수 없는 일에 미련을 남길 필요는 없다

하는 일마다 모두 쓸데없는 것은 아니어서

흔한 눈물도 함께 필요할 때가 있으나

지나가는 바람처럼 자주 오는 것들을

그저 기다릴 뿐이다

지난 시절에 절로 자라나서 무성한 채 헝클어진

내 기억의 가지도 아낌없이 잘라내는

가지치기 한 가지 일로도

한 봄이 가고

한 해가 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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