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반원 김씨, 이씨, 최씨

2008. 9. 29. 15:17글 소쿠리/자작 시 모음

철거반원 김씨, 이씨, 최씨


음지에 머물던 바람이 달려와 허술한 소매를 파고 든다

맨살에 닿는 바람이 차다

산 위에는 녹지 않은 눈이 보인다


-김씨의 넋두리-

내가 이래봬도 왕족이라오

수로왕  41 대 손이오.

할아버지 때는 전라도 깅개 밍개 벌에서 날리던 천석군의 자손인데

우리 아버지 삼 형제가 모두 노름 바람이 들어

꼬치에 곶감 빼 먹듯이 야곰야곰 다 팔아먹고

어찌어찌 남은 것 털어 대학은 나와

내 시간 아껴서 남의 공장 돌려 신나게 돈벌어주고 받은 것이 너무 적어

이 노력하면 어디 가서 못살겠나

내 땀을 내가 갖겠다고 혼자 나와 일하면서 재벌 총수 꿈꾸다가

종업원이 다섯도 되기 전에 구제 금융 한파 맞고

꿈보다 빚에 쫓겨 밤낮으로 숨어 다니다

옷 한 벌 걸친 알거지 되어 떠돌다가

여기까지 왔네, 여기가 내 생의 막장인가벼


-이씨의 넋두리-

나는 바닷가 갯 것이라요

짠내 맡고 컸지만 순 맹물이지요

멸치바리 한 철에 몇 백 벌어갖고

제 복에 없는 돈번다고 간통 빌려 젓갈 담그니

재벌이 수입한 칠레산 수입 젓갈 파도에 속없이 썩어가고

땅 위에서 하는 일은 마디마디 꼬이는데

마도로스 끗발은 한 바람에 가는 것이라네


-최씨의 넋두리-

내사 영양 골짜기에서 소 몇 마리 먹이고 고추 농살 지었는데

물지게 지고 헉헉대던 봄 가뭄 때 꺼정은 땀을 흘려도 행복했지

이름도 얄궂은 서양 귀신 옐리노 탓인지

온 여름 내내 비가 퍼붓더만

횟배 괜 입에 침 고이듯이 비탈 밭에 까지도 물이 고여 뿌리 썩으니

고춧대가 월남전 때 식스틴 총알 맞은 베트콩처럼 쓰러지더니

온 밭이 제초제 뿌린 잡초처럼 내려 앉아버렸고

자식이 죽어도 그리 슬프지 않을 것인데

질금거리다가 누구를 붙잡고 울 수도 없고

고추팔아 갚을라고 봄에 융자 낸 농협 돈은 착실히 새끼치는데

소 값도 개값이라 기도 안차서 도망쳐 버렸지


우리 셋이서 이따 일 마치고 한 판 붙을라요

쪼그라진 인생인데 한 사람이라도 기쁠 거리를 가져야지


내 집은 발로 차도 넘어지는데

아따 이 집은 부실이 아닌가베

돌덩이처럼 여무네

새빠지게 해머질 해도 빠개지질 않네


우리가 부숴야 할 것은 이 건물이 아니라

지난한 우리 삶

타인의 망치질에 어그러진 우리의 희망이지요,

않그렇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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