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6. 18. 11:47ㆍ글 소쿠리/자작 동화
선생님은 바보다
가끔씩 바보처럼 구는 어른들을 봅니다만 읍내 장거리에 나돌아다니고 초상집 문전에나 기웃거리면서 바지 앞섶을 늘 열어 다니는 포교당 앞에 사는 달땡이나 시장거리에 혼자 중얼거리며 이것저것 버린 음식을 주워 먹고 돌아다니는 조무생이라면 모를까 그토록 들어가기 힘이 든다는 대학을 마친 우리 선생님이 그런 바보라면 누가 믿을까
지금 내가 다니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포항에 유학을 가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우리 삼촌은 세 번이나 떨어졌다는 대학을 나와서 우리를 가르친다는 사람이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하기야 우리 삼촌은 공부를 잘해서 포항까지 간 것이 아니라 가까운데 있는 중학교조차 너무 멀어서 집에서 다닐 처지가 못되어서 간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지난봄에만 하여도 우리 동네에는 밤사이에 내리기 시작한 눈이 아침까지 와서 마당에 가득 쌓였고 길도 보이지 않아서 학교에 갈 수가 없었는데 비가 왔는데 학교에 오지 않았다고 핀잔을 주더니 눈이 많이 와서 길이 막혀서 못 왔다니까 와보지도 않았으면서 내가 거짓말한다고 끝까지 역정을 내었다.
우리 집은 하늘재에 있다. 학교에서 빨리 걸어도 삼십 분이나 걸어서 겨우 닿는 보경사 절 밑에서 키 큰 소나무 사이로 난 길을 한참 올라가다가 그 길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가파른 길을 걸어 올라가서 다시 할머니 허리처럼 굽은 언덕이 불쑥 올라와 있는 꼬부랑재를 하나 더 넘어야하는데 엄마 젖가슴 닮은 봉오리 하나가 집 앞에 버티고 있어서 학교 마당에서나 절 마당에서 쳐다보면 보이지도 않는다
“그럼 전화라도 해야지” 하시기에 전화가 없다고 하니 그것도 거짓말이라고 한다.
높은 산중턱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집이라서 전기가 없는데 전화가 있을 리가 없다. 물항리에 있는 야영장에 온 학생들이 촛불 의식을 한 뒤에 남은 초를 얻어 쓴다. 어느 해 가을에 물항리 야영장에서 일하는 선생님이 등산을 왔다가 우리 집 마당에서 물 한잔을 얻어 마시고 쉬었다 간 뒤에 초를 몽땅 갖다 주기 시작한 이후로 해마다 한 가마니도 넘는 초를 얻어다 쓴다.
동네 앞산을 엄마 젖가슴 닮았다고 했지만 나는 엄마의 얼굴을 모른다. 무덤이 없는 것을 보면 죽지 않았다면 살아있을 텐데 내가 물을 때마다 할머니는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얼버무리시니 살아있다 해도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 손에서 자란 탓인지 할머니의 말라빠진 젖을 만지고 자랐으니 할머니는 나를 “내 강생이‘ 라고 부른다. 나를 항구영감네 손자라고 부르는 장터에 있는 두부 가게 아줌마나 상용이 새끼라고 부르는 참기름집 아줌마처럼 엉덩이가 펑퍼짐한 아주머니와는 다를 것이다. 집에 한 장 남아있는 흐릿한 가족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어머니는 갸름한 얼굴 모습이 우리 담임선생님보다 훨씬 더 예쁘다. 그러나 고추를 내 놓고 있는 내가 이렇게 변했으니 어머니 얼굴도 많이 변해서 어디에서 만나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했는지도 모른다.
보경사 절 머리로 들어서는 길가에 줄을 서 있는 벚나무의 꽃이 호드라지게 핀 어느 날 오후 종례 시간에 내일부터 가정방문을 한다고 했다. 올해는 먼 곳에 있는 집이라도 한 집도 빠지지 않고 다 다녀볼 것이라고 하기에 속으로 원동에 있는 철문이네 집이나 평리의 신숙이네 집에는 갈 수 있어도 우리 집에는 오지 않을 걸하며 속으로 혀를 날름 내밀었다. 가정방문이 시작된 나흘 째 되는 토요일 오후에 내게 남아 있으라고 하더니 퇴근 후에 같이 우리 집에 가자고 했다.
가정방문을 간 집마다 공부방을 들여다본다는 말을 들은 터라 구질구질한 내 방을 보여주기 싫어서,
“우리 집은 너무 멀어서 못 가실걸요” 하니까
“얘, 멀어봤자 우리나라 안 아니니?” 하면서 웃으면서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사택에 들어갔다 나오는 옷차림을 보고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가끔 그런 옷차림으로 우리 집 쪽으로 올라온 사람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낭패를 당한 얼굴로 엉덩이에 흙먼지를 잔뜩 묻혀서 우리 집 마당 앞을 서성거리는 것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아저씨는 빠진 구두 굽 하나를 손에 들고 작은 못과 망치를 빌려 달라고 부탁을 하러 찾아 온 일도 있었다.
절 입구까지는 버스를 타고 올라갔다.
나는 걸어가고 싶었지만 어떻게 그 먼길을 걸어다니니 하면서 버스를 타고 가자고 하기에 못 이긴 채 버스를 탔다. 절까지 가는 길은 절에서 우리 집까지 가는 길에 비하면 거리나 험하기가 새발의 피인데 가기도 전에 엄살부터 떠는 것이 우습기도 하였다.
절 마당에서 차를 내릴 때 관광객 두 사람이 함께 내렸는데 선생님더러 어디까지 가느냐고 말을 부쳤는데,
“하늘재에 있는 이 애네 집에 가는데요” 하니까 선생님의 아래위를 훑어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절 마당으로 들어가는 길로 갔다.
그 때까지도 바보 선생님은 그 아저씨들이 왜 고개를 저었는지 모르고 있었으니 옆에서 보니 딱하기까지 하였다.
소나무 숲 속 길로 가는 도중에 약초를 캐는 김씨 아저씨를 만났는데, 선생님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귀밑의 큰 상처가 실룩거리도록 히죽이 웃으면서
"상롱이 이제 가니......." 하셨다.
"상롱이가 아니고 도영인데요, 장도영이요" 하고 빽 소리를 지르자
"그래 도롱이지, 도롱이가 맞지" 하면서 잔대 한 뿌리를 내밀면서
"심심한데 씹어 먹으면서 가거라" 하셨다.
잔대를 내미는데 망태를 둘러 맨 왼쪽 어깨 쪽에 빈 소매가 덜렁거렸다.
그것을 보고 놀란 선생님은 두 어 걸음 뒤로 물러 서 있었다.
한참을 말 없이 따라 오던 선생님이,
"아까 그 사람 무섭지 않니?" 하고 물으셨다.
"팔 때문에 그러세요?" 하고 물으니
"얼굴에 상처도 그렇고........"
"참 좋은 아저씨예요, 약초 캐러 산에 오면 우리 집에도 가끔 들렀다 가는데요. 저 지난 해 겨울에 사고로 다쳤어요. 경운기에 나뭇짐을 싣고 내려오다가 응달에서 미끄러져서 언덕 아래로 굴러서 팔 하나를 잃고 머리를 다쳤는데 가끔씩 정신이 오락가락해도 마음씨는 착하데요" 하니,
"얘, 그래도 난 무섭더라........“ 하셨다.
꼬부랑재 밑을 지나가는데 내 팔 길이 만한 꽃뱀 한 마리가 길가에 나와 있었다. 땅 속에서 이제 막 나온 놈인지 달아날 생각을 하지도 않고 길 가운데서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선생님은 얼굴이 새파래져서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재빨리 내 뒤로 숨었다.
길옆에서 막대기를 하나 주워들고 뱀에게 다가가니,
“조심해라, 물릴라” 하기에
“땅 속에서 갓나온 봄 뱀이라서 괜찮아요, 더구나 저건 독도 없는 너불대고요”하면서 막대기를 뱀의 허리에 넣어서 옆의 숲 속으로 던져 버렸더니,
“너 대단하구나” 하면서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뱀은 자주 보는데요, 가끔 독뱀도 보고요. 그 놈들은 좀처럼 움직이지도 않고 혀를 내밀면서 노려보는데 그럴 때는 저도 좀 무서워요” 하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을 하였다.
꼬부랑재를 벗어나서 줄맨등을 돌아갈 때 내가,
“선생님, 저 가파른 언덕을 뭐라고 하는 지 아세요? 줄맨등이라고 하는데요, 너무 가팔라서 사람들이 그냥 오르기는 힘이 들어서 줄을 매어서 잡고 올라간다는 뜻으로 그렇게 부른데요. 그렇지만 저는 그냥 오를 수 있거든요.” 하자 뒤따라오던 선생님이,
“어머 할미꽃이 피었네” 하면서 길가 무덤 옆에 피어 있는 꽃을 가리켰다.
“할미꽃을 오랜만에 보는구나, 이전에는 흔하게 볼 수 있었는데 무슨 약으로 쓴다고 알려진 뒤에는 사람들이 마구 파 가는 바람에 보기 어려운데 여긴 많이도 있네” 하며 신기한 듯이 누런 잔디가 깔린 무덤 옆을 빙빙 돌았다.
“그런데요, 할미꽃의 겉모습은 허리가 굽은 할머니처럼 보이지만 속은 아주 빨갛고요, 노란 꽃밥들이 단단히 뭉쳐져 있어요. 한 번 보실래요?”
내가 할미꽃 하나를 따서 속을 드러내 보이자,
“어머 정말 그렇구나, 그런데 넌 어떻게 그런 것까지 다 아니?” 하면서 신기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폭포 옆을 지나가는 가파른 길을 걸어갈 때 까마득하게 보이는 벼랑 밑을 내려다보더니 겁을 잔뜩 집어먹고는,
“얘, 넌 쪼끄마한 게 무슨 걸음이 그리 빠르니? 나랑 같이 가자”
하면서 몇 번을 앞서서 가는 나를 불렀다. 자잘한 떡돌이 발 밑에 밟히면 더 잘게 부서지는 떡돌 밭을 지날 때는 엉덩방아 몇 번이나 찧더니 답답하게 쉬었다 걸었다 했다.
산길을 가는 도중에 나무꾼들이 쉬어 갔다고 하는 편편한 나뭇짐 쉼터에서,
“지난달에 산 새 신발인데, 이러다가 구두 뒤축이 다 망가지겠네.......“ 하면서 구두를 벗어서 속에 든 흙을 털어 내며 중얼거렸다.
올라가는 동안에 가만히 살펴보니 일흔이 훨씬 넘은 우리 할아버지 보다 못 걸었다. 할아버지는 장에 내다 팔 산나물이나 약초 말린 짐을 지고 다니시는데 중간에 한 번쯤만 쉬고는 잘도 가시고 장터에서 막걸리 한 사발 하시고는 달도 없는 밤에도 잘도 오시는데 말이다.
집에 도착하니 할머니는 집 뒤 남새밭에서 시금치를 캐고 있었다.
마당에서 장작을 패시던 할아버지는 선생님께 인사만 하고는 망태기를 메고 산으로 올라 가셨다. 할머니는 선생님이 우리 집까지 오셨다는 데 놀라서 정신이 없는 사람처럼 허둥거리셨다. 마실 것 하나 준비해 둔 것이 없어 드릴 것이 없다고 하시기에 내가 뒤란의 샘에서 막 퍼 올린 물을 한 그릇 드렸더니,
“아, 시원하구나, 물맛이 참 좋은데.......,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갈 것 같아” 하면서 벼랑 위인 마당 끝에서 산 아래를 내다보더니, 할머니께,
“경치가 참 좋네요. 저 아래 길가의 벚꽃이 다 보이네요.” 라는 소리만 되풀이하였다.
올라올 때 시간을 너무 끌었고 할머니께서 찬이 없어도 저녁이라도 잡숫고 가라는 부탁을 여러 차례 하셔서 그런지 선생님은 어두울 때까지 집에 머물러 계시면서 뒤란을 둘러보고 토끼장 앞에서 풀을 집어 주기도 했고 버섯을 기르는 숲 속까지 가서 신기한 듯이 막 얼굴을 내미는 표고버섯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내 친구 누렁이는 고개를 내밀더니 이따금 큰 눈을 두리번거리며 낯선 손님을 살피다가 “음무우“ 하고 긴 울음소리를 내지르기도 했다.
저녁을 짓는 할머니와 선생님이 하는 이야기가 부엌 문틈으로 연기와 함께 밖으로 흘러 나왔다.
“ 저 애 애비......., 스무 살 때 군대 지원......., 돈 벌겠다고 월남전......., 독한 제초제......., 저 애 위의 큰 애....... 열 살 때부터 갑자기, 자기 탓이라고......., 머리가 이상해져......., 농약......., 저 에 어미......., 그 일이.......뒤에, 어릴 때 집을 나갔고........, 그 때부터......., 불쌍한 것....... ”
“제 아버지께서도........, 육 이오 때......., 중상......., 고생하다가......, 제가 어릴 때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할머니의 눈가가 짓물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나는 못들은 체 하고 누렁이가 있는 마구간으로 가서 할아버지께서 베어둔 꼴을 한 움큼 집어 주웠다. 갑자기 슬퍼지는 내 마음을 아는 지 누렁이도 큰 눈을 끔벅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저녁밥을 먹고 나자 날이 어두워져서 내가 큰길까지 바래다준다고 하자 할아버지께, 아예 내일은 일요일이고 장날이니 구경을 한 뒤에 할아버지가 장에 내려오시면 같이 올라 올 수 있으니 지금 데리고 가도 되느냐고 허락을 받아냈다.
큼직한 마른 산나물 보따리를 든 할아버지께서 절 뒤 소나무 숲까지 바래다 주셨지만 사택에 도착하니 시간이 꽤 늦어 있었다.
어두운 방에 불을 켜고 난 뒤에,
“네가 이 방에 처음 들어온 남자네” 하시면서 웃으셨다.
그 날 산길을 오고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탓인지 가정방문이 끝나고 나서는 선생님이 내게 부쩍 가깝게 굴었다. 내 짝인 은영이와 병태가 궁금해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지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철이 없지만 지켜야할 것은 지켜야 한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으니 선생님이 착한 김씨 아저씨를 보고 놀랬다거나 비실비실한 꽃뱀을 보고 겁이 나서 내 등뒤로 숨었다거나 하는 따위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날 이후부터 수업이 빨리 끝나는 날에는 귀찮게 남으라고 하고서는 억지로 글자를 가르쳐준다고 난리다.
“넌 2학년이나 되는 애가 자기 이름도 제대로 못쓰니?” 하면서 이름도 제대로 못 쓴다고 구박을 허거나 유치원 꼬맹이들이 보는 그림책을 읽어보라고 주었다. 그리고 교실 뒤에 있는 사택으로 데려가더니 따뜻한 물을 큰 통에 가득 받아서 손을 씻겨준다거나 목욕을 시켜준다며 몸을 살피고 해서 부끄러워 혼이 났다.
“ 얘, 네 손을 보면 까마귀가 할아버지 하면서 달려오겠다”
하고 핀잔을 주거나
새 옷을 입혀 주면서
“조카애가 입던 옷인데 너무 자라서 작아서 못 입는다기에 아까워서 얻어왔어” 하면서 내가 미안해할까 봐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나 나도 입던 옷에는 상표가 붙어 있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남아서 공부를 할 때마다 나는, 빨리 가서 누렁이와 놀아주거나 토끼풀도 뜯어줘야 하고 산 속에 한 발짝만 들어가면 떡볶이나 어묵을 사 먹을 수 있는 돈과 바꿀 수 있는 산나물이 무더기로 있지만 시간이 없어 못 뜯을 지경이어서 속이 바짝바짝 타는데 글자공부를 하는 도중에 엉뚱한 생각을 한다고 가끔씩 내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유월 초순의 어느 날 오후였다. 반 아이들이 모두 돌아가고 텅빈 교실에 혼자 남아 있으니 학교 옆 아카시아 숲에서 우는 지 뻐꾸기 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받아쓰기 공부를 하다가 그만 깜박 잠이 들었나보다. 받아쓰기 숙제를 내주고 교무실에 가셨던 선생님이 교실로 돌아오셨다. 가만히 엎드려 있는 내게 다가오더니 등을 끌어안았다. 선생님의 얼굴이 내 등에 닿자 처음 맡아보는 아릿한 냄새에 머리가 어질어질하였으나 마음은 참 따스해졌다. 아마 엄마 냄새를 맡으면 이럴 것이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니 등이 축축해지기에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보니 선생님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였다. 눈물은 슬플 때만 흘려야 한다는데 왜 다 큰 어른이 바보같이 슬픈 일도 없는데 눈물을 줄줄 흘릴까?
그리고 나는 왜 눈물이 날려고 할까?
눈물도 감기처럼 옆 사람에게 옮기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