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흰소리

간첩같은 사람

황포돛배 2008. 12. 26. 00:34

요즘은 좀 뜸하지만 이전에는 수상한 사람을 보면 신고하자는 글이 동네 곳곳의 벽이나 전봇대에 붙어있었다.

그런데 이 수상한 사람을 판별하는 기준이 애매모호하여 좀 특이한 차림이나 유별난 행동을 하면 무조건 신고 대상이 된 적도 있었다.

 

그 시절에 넋을 놓고 돌아다니다가 수상한 사람으로 몰려서 신고를 당한 적이 여러 번 있다.

보헤미안 기질이 있었지만 지극히 평범한 국민이었는데도 남들 눈에는 그렇게 비쳤나보다.

 

20대 무렵에 나는 방황을 많이 했다.

 내 처지가 남들보다 유달리 팍팍한 것은 아니었지만,

주변이 조용한 것은 아니었고 굳이 그런 이유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나는 기인같은 행동을 자주했다.

 

밤늦게 넋을 놓고 돌아다니거나,

술에 취해 바닷가에서 목을 꺽고 울거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산이나 들로 헤매고 다니곤 하였다.

얼굴은 깡말랐었고,

눈빛은 날카로우니,

이런 나를 보고 사람들은 저 위쪽에서 고된 훈련을 받고 내려온 사람쯤으로 여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 무렵에 내가 겪은 몇 가지 애피소드를 이야기로 엮어보고자 한다.

 

1. 잡았다.

그 때는 몰랐지만, 예비군 훈련을 받던 시절이야말로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공부를 더 한다고 대학원에 적을 두고 있을 때는 학교에서 예비군 훈련을 받았다.

동원은 면제되었고 방학 때 이틀쯤 학교 운동장에 나가서 어슬렁거리는 것으로 훈련을 대신했다.

한마디로 편했다.

첫발령을 받아서 남해에서 중학교 교사로 근무를 할 때였다.

여름방학 때 주소지인 진주 근처 문산의 예비군부대에 훈련을 받으라는 통지를 받고,

여관에 자기도 그렇고해서 훈련 받는 부대 근처에서 야영을 하려고 텐트를 챙겨서 진주로 올라갔다.

낮에는 텐트를 철수하여 막걸리를 파는 인근 가게에라도 맡기고, 훈련을 받도 난 뒤에 저녁에 거나하게 한 잔 할 궁리를 했다.

부대 근처에서 텐드를 치고 자고, 음식을 손수 해 먹으려고 준비를 해갔으니 짐이 잔뜩 한 짐이었다.

무거운 배낭을 매고 부대 근처에서 텐트칠 곳을 몰색하느라고 돌아다니는데,

등 뒤에서 누가 배낭을 낚아채면서,

"잡았다" 고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다.

갑자기 등 뒤에서 잡아당기는 바람에 무거운 배낭이 뒤로 기울면서 몸이 휘청거려 넘어질 뻔했다.

몸의 중심을 잡고 돌아보니 웬 중늙은이가 배낭을 쥔 채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급히 피하려니까 이 어른이 집요하게 내 배낭을 잡고 놓질 않았다.

나는 벗어나려고 하고, 이 어른은 놓치지 않으려고 하였으니 실강이 아닌 실강이가 벌여졌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중늙은이는 내가 마을 입구에서 버스를 내려서 돌아다닐 때 부터 나를 수상하게 여겨 살피고 있다가 자전거를 타고 뒤따라 왔던 것이다.

예비군 훈련을 왔는데 그냥 텐트를 치고 자려고 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지 못했다.

이 중늙은이 눈에는 내가 한 행동이 여지없이 간첩이었던 것이다.

낯선 사람이,

부대 인근에서 군사시설을 탐지하고(텐트칠 자리 찾는다고 빙빙 돌아다녔으니 그렇게 여겼겠지),

자기가 다가가니 달아나더라는 것(텐트칠 곳이 마땅치 않아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던 찰나였으니)과 몇 가지 더 수상한 사람(?)에 해당되는 이유를 듣고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물론 이 어른이 이야기할 때 실실 웃다가 또 혼이 났지만 말이다.

부대에 가서 예비군 훈련을 왔다는 사실을 입증해도 영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고,

더 웃기는 것은 부대 입구에서 근무중이던 초병조차 삐딱한 시선으로 보는 것이었다.

 

2. 남해 서면 예비군 출동 사건

초임 발령 때는 멋모르고 운동에 소질이 있는 아이들을 키워보겠다고, 몇 명을 뽑아서 이른바 강훈을 시켰는데, 아이들을 운동 시킨다고 함께 뛰던 시절의 이야기다.

내가 발령을 받아가는 해에 졸업을 한 아이 하나가, 중장거리 달리기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이른바 올림픽을 앞두고 우후죽순처럼 열리던 도단위 마라톤대회에서 우승을 했고,

이 단 한 번 있은 사실 때문에 아이들도 꿈을 가지게 되었으니 신출내기 체육교사이던 나도 잔뜩 고무되어 있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해 허약한 아이들을 데리고 무슨 국가대표 상비군이라도 되는 양 엄청나게 훈련을 시켰다.

새벽 훈련도 빼놓을 수 없어서,

휴일에는 망운산 자락의 중턱까지 달려오라고 해서 아이들에게 산악훈련(?)을 시켰다.

그날도 일요일 아침이었던 모양이다.

전날 마신 술이 덜 깼지만,

의욕이 앞선 선생답게 새벽같이 일어나서 걸어서 몇 킬로쯤 되는 산중턱에 가기 위해 비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워낙 차량의 통행이 뜸한 시골이었지만,

자갈이 깔린 비포장도로인지라,

어쩌다가 차가 지나갈 때면 먼지가 지독하게 일었다.

그를 때마다 고개를 돌려 외면한 채 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걸었다.

전날에 주말이랍시고 마음 놓고 거나하게 퍼마신 술 때문에 골치도 아팠고, 빈 속이 제법 쓰렸다.

게다가 먼지가 일 때 마다 오만상을 찌푸린 채 걷자니 적잖이 짜증도 났다.

한참을 걸어가고 있는데,

지나가던 차가 서더니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길래 퉁명스럽게 저기 간다고 대충 얼버무려 대답했다.

태워준다고 타라고 하길래, 차 안을 들여다보니 몇 번 본 적이 있어 아는 사람이었다.

술냄새를 풍기면서 옆자리에 앉기도 그렇고 해서,

됐다고, 그냥 걸어가겠다고 했더니 미심쩍은 눈으로 한참을 쳐다보더니 차를 몰고 가버리는 것이었다.

도로를 벗어나 산자락에 올라가는데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오토바이와 승용차를 탄 예비군들이 새까맣게 올라오고 있었다.

무슨 훈련이 있는가 보다하고 그냥 길을 가는데,

내 주변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와서는 카빈총을 겨누면서 모두 땅바닥에 포복을 하고 전진을 하는 것이었다.

그 때까지도 나는 그 총부리가 나를 겨누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지휘관인 듯한 사람이 소리를 지르고 ........

나중에 아는 사람이 나를 발견하고는,

중학교 체육선생님 아닙니까?"  할 때서야 나는 그 사람들이 나를 애워싸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뒤에 예비군 중대장에게 들은 이야기인즉슨,

차를 타고 가던 사람이,

이전에도 간첩이 침투한 적이 있는 바다가 멀지 않는 도로상에서,

새벽에 바짓가랭이에 이슬이 잔뜩 묻은 채로 길을 걸어가는 수상한 사람을 발견하고,

용감하게 접근을 하여 신분을 확인하였으나, 외면한 채 말을 얼버무렸고,

여러가지 정황으로 판단했을 때 영낙없는 간첩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면소재지 예비군 중대에 신고를 했고 인근 읍면의 예비군들에게 비상이 걸렸다는 것이었다.

차를 운전하던 사람이 누군지 나는 알았고,

그냥 귀찮아서 묻는 말에 대충 대답했다는 내 말을 잘 믿질 않았다.

해방 후 혼란시기에 휘파람을 불고 다녔다는 집안의 한 어른 때문에,

자랄 때부터 신원조회라면 잔뜩 겁을 먹고 있던 나는 이 일로 두고두고 가위눌림을 당해야 했다.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면내 기관장회의 때 예비군 중대장이 교장에게 직원교육 좀 잘 시키라고 충고를 했다는 사실이다.

 

3. 산업 시설 탐지 혐의

내가 초임 발령을 받아서 근무하던 서면중학교가 있던 중현리는,

전라남도 여수의 호남정유 등 국가 중요 기반 시설이 멀지 않는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 빤히 보이는 그런 곳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 무턱대고 한 번 써 낸 글로,

그 때로서는 엄청나게 큰 상을 한 번 받고 나서 부터 문학의 천재성을 지녔다고 착각에 빠진 나는,

소싯적부터 앓던 문학에 대한 열병을 시골 중학교 체육선생이 되어서도 버리지 못했기에 늘 글을 끄적이곤 했다.

작은 수첩과 필기구를 준비해 다니다가 시상이 떠오르거나 글을 쓸 소재가 생각나면 수시로 메모를 하곤 했는데,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가 칙칙하게 내리는데도 혼자 바닷가에 나가서 글을 끄적이고 있었다.

호남산업단지가 빤히 내려다보이는 서상 바닷가에 앉아서,

그리움과 회한이 얽힌 가슴 속 엉어리를 서투른 시로 풀어내고 있었는데,

비가 쏟아지는데도 흠뻑 젖은채로 가끔씩 바다 건너를 쳐다보며 무엇인가를 열심히 꺼적거리는 수상한 내 행동이,

이런 내 꼴을 30분이나 관찰하던 초병이 마침내 총을 겨누고 살금살금 다가오게 만들었다.

"손들어"

초병은 짧고 강하게 외쳤다.

뜻밖의 고함소리에 놀란 내가 화가나서 째려보자 이 초병은 더욱 의기양양하여,

방아쇠를 당기기 일보직전까지 가는 상황이 발생했다.

끌려가다시피하여 초소책임자인 신삐 소위계급의 소대장을 만나서,

아무리 사정을 이야기해도 잘 알아듣지 못했고,

낙서에 가까운 내 시를 무슨 암호로 간주하는 경직성 앞에 웃을수도 울 수도 없던 일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