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기도
어머니는 많이 배우시지는 못하셨지만 집념이 참 강하신 분이었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가끔씩 하실 때마다 일제시대 때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솔갱이(관솔)을 부지런히 많이 따서,
당시에는 귀한 도시락을 상품으로 받았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어린 나는, 전쟁 물자 갖다바치고 일본사람들에게 상 받은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자랑이냐고 따지듯이 말했지만,
한참 세월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부지런한 성품탓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난 시절의 여느 농촌살림이 다 그랬듯이, 우리집 또한 넓지 않은 땅떼기에 농사를 지어,
여섯 식구 먹고, 우리 자식들 공부 시킨다고, 생활이랄 것도 없이 팍팍하게 살았다.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해서,
배우지 못한 한을 뼈저리게 느끼신 아버지는 어떻게 하면 우리 자식들을 남들만큼이라도 가르칠까 밤낮으로 고민하시다가,
특수작물 재배에 눈을 뜨기 사작하셨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비닐하우스를 짓고,
온실을 만들어 일찍 모종을 키우는 등의 선진농사 수법을 책을 봐가면서 연구하고 손수 경험으로 익히셨다.
말이 특수작물이지 지금처럼 택배로 파는 것도 아니고, 다른 유통경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산물을 어머니께서 시장에 내다 팔아야 했으니 그 어려움은 만만치 않았다.
자연히 새벽까지 다듬고, 묶어서 장에 내다 팔아야 했으니 잠을 설치기가 일쑤였고,
억척이신 어머니는 돈을 한푼이라도 아끼신다고 장터에서 싼 국수 한 그릇도 드시지 않고,
허기지고 지친 몸으로 돌아오시곤 했다.
우리 가족이, 영일군 대송면 동촌(지금의 포스코 자리)에 살았던, 어머니의 젊은 시절에,
어떤 연유로 성당에 나갔는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이웃의 권유이거나 당시에 성당에서 나누어 주던 구호물자와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전쟁이 막 끝난 지 얼마되지 않을 때니까,
사람들의 삶이 너나없이 피폐하던 시절인데,
별다른 기술이 없던 아버지는 오천에 주둔 중이던 미군부대의 임시 군무원으로 근무를 했지만 월급을 고정으로 받거나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먹을거리를 얻어 보탤 수 있는 곳이 구호물자가 넘치던 성당이었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얻어온 구호품으로 배고픔을 면했다는 이야기를 가끔씩 하시곤 했다.
송정라고 불리던 바닷가에 있던 성당은 집에서 걸어가면 한 시간도 족히 넘게 걸리는 먼거리였다.
가난으로 고통받고, 남편들에게 업쑤이여김을 당하던 이역의 아낙네들에게,
자상하신 외국인 신부님들은,
늘 따뜻한 웃음으로 대해주셨고 믿음을 전해 주셨다.
대부분 잊어버린 내 어릴 적 기억 가운데 성당에 얽힌 것들은 또렷하게 남아 있는데,
거대하다고 느꼈던 풍차와, 굳은 얼굴의 동네 어른들과는 달리 늘 웃는 얼굴로 맞아 주시던 자상하신 신부님들의 웃는 얼굴이 남아 있다.
누이와 나는 유아 영세를 받았다.
주일날에 미사가 끝나고 친구들과 성당마당에서 놀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 믿음에도 고비가 있었다.
종합제철(지금의 포스코)가 들어서면서 우리는 집단으로 이주를 해야했고,
공사가 시작되면서, 아버지께서 양자로 입양이 된 작은 할아버지댁인 감포로 이사를 했는데,
감포에는 성당이 없었다.
물론 지금도 공소는 있지만 성당은 없다.
오랫동안 냉담 아닌 냉담을 했다.
그리고 막내 여동생을 낳고나서 산후조리 부족으로 생긴 병이 깊어졌지만 제대로 치료를 하지 못해서 오랫동안 거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 동안에는,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미신에 의존하기도 했다.
어머니께서 마지막으로 성당에 나가신 뒤에 , 20여년이 훨씬 지나서 다시 성당에 나가셨다.
이 무렵에는 병이 완전히 낫지 않았지만 불편하기는 해도 혼자 차를 타기 위해 마을로 내려가는 정도의 거동을 하실 수 있었고,
자식인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학교에 교사로 근무를 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은 더 이상 겪지 않을 때였다.
어느날 어머니는 포항행 버스를 타고 오천에 새로 생긴 성당에 다녀오셨다.
이전에 4일장인 오천장에 까지 채소를 팔러 다니실 때, 가고 오시는 길에 성당을 보신 모양이었다.
이 때쯤해서는 아버지께서 교통사고로 몸을 다치셔서 거동이 불편하셨기에, 논농사를 다 폐농하고 그냥 집 옆의 밭에 먹을거리 정도만 가꿀 때였다.
기운이 떨어지시면서 아버지의 강팍한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고 비로소 어머니만의 자유로운 시간을 낼 수가 있었다.
오천 성당에 다니실 무렵에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면서 인구가 늘어나서,
오천보다 거리가 가깝고 교통편이 편리한 이웃지역인 양남에도 성당이 들어섰고,
감포 읍내에 살면서 성당에 나가는 아는 사람들 가운데 차를 갖고 다니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기에 다니시기가 한결 수월하셨다.
이른바 차량 봉사를 하시는 교우들이 몸이 불편하신 어머니를 위해 외딴 우리집까지 차를 타고 모시러 오셨다.
우리 가족이 주말에 고향에 가면,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성당에 나갔고,
그럴 때는 차가 없는 또 다른 분들과 함께 가기도 했다.
읍내에 공소 예배를 볼 곳이 마땅치 않아서 한동안은 방이 넓은 우리집에서 공소예배를 보기도 했다.
아랫 마을에 샛방을 살던 우리가 집으로 들어갈 때 아랫채를 새로 지으면서 큰 방을 두 개 만들었는데,
방이 널찍하였고 마당이 넓어서 차를 대기에 편리해서 공소예배를 보기에는 괜찮았다.
어머니는 공소예배에 오시는 신부님이 즐기신다고 집에서 농주를 담그셔서 미사가 끝나면 내놓으시곤 했다.
박치릴로 신부님과 맺은 두터운 이런 정 때문에, 포항 우리집에 와 계시던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누이와 우리가 나가던 장성성당에서 장례미사를 할 때는,
치릴로신부님께서 포항까지 오셔서 직접 장례 미사를 집전해주셨다.
고향에 계실 때 어머님께서는 늘 성서를 베끼시고 묵주기도를 하셨다.
어머니께서 봉헌한 묵주기도는 늘 왠만한 신자들 몇 사람 몫보다 더 많았다.
병중에 마지막 가시는 순간까지도 기도를 잊지 않으셨다.
세상을 떠나시기 사흘 전쯤에는 자식인 나를 불러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시면서,
고향 선산에 있는 아버지 산소 옆보다는 초곡에 있는 천주교 묘지에 묻히고 싶으니 그렇게 해달라고 당부를 하셨다.
병이 워낙 위중해서 직접 모시고 가지는 못했지만 누이와 내가 초곡천주교 묘지를 둘러보고 나서,
어머니께서 누울실 곳을 보고왔다고 하니 흡족해 하셨다.
운전을 하면서, 또 이런저런 위험에 처했다가 면할 때마다,
나는 늘 새벽에 일으나셔서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최근에는 피붙이의 복잡한 일로 문제가 생겨서 잘 해결되지 않고 막막해졌고 여러 어려운 일이 겹쳐서 기운이 쏙 빠져 있었는데.
잘 해결되었다는 아내의 전화를 받고 나서,
사택의 어두운 방 한가운데 혼자 침대에 누워서,
살아계실 때 늘 정성으로 올리시던 어머니의 기도 덕분으로,
실타래처럼 얼킨 문제들이 쉽게 풀려나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께서는,
몸은 비록 오래 전에 우리 가족 곁을 떠나셨지만,
우리의 기도 가운데 늘 우리와 함게 하신다는 것을 한 없이 고맙게 여기며 살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