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소쿠리/붓가는대로 쓴 글

삶의 바다를 건너는 법

황포돛배 2008. 6. 26. 09:08

 삶의 바다를 건너는 법

 

  대학입시를 위한 수능시험을 치러 육지로 나갔던 고 3 아이들이 열흘 만에 일요일인 어제 오후에 들어온 배로 돌아왔다. 알 수 없는 가을철의 바다 날씨 때문에 시험을 치기 1주일 전에 모두 급하게 육지로 나갔는데 이 삼일 뒤에나 뒤따라간다던 담임선생님은 나가지도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애를 태워야 했다. 아이들이 모두 나간 다음날부터 폭풍주의보가 내려서 엿새나 뱃길이 끊기는 바람에 혹시나 나가지 못한 수험생이 있는지 확인하는 전화가 경찰서와 인근의 군부대 등 여러 곳에서 왔다. 여차하면 헬기로 수송을 하여야 할 판이어서  연락이 왔는데 다행히 나갈 아이들은 모두 나간 뒤여서 최악의 응급 사태는 생기지 않았다.   섬에 온 지 두 해가 다 되어 가지만 아직도 알 수 없는 것이 바다 날씨여서 어떤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일기예보 안내 전화를 확인하거나 기상청 홈페이지를 들락거리지만 번번이 길이 막히곤 한다.   오늘도 해상에는 초속 20미터가 넘는 태풍에 버금가는 강풍이 불어서 육지로 가는 뱃길이 끊겼다. 이번 달 들어서 열흘이 넘는 기간 동안에 배가 두 번 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눌러보는 자동응답기가 설치된 여객선 운항 안내 전화는, "오늘은 동해상에 발효 중인 폭풍주의보로 인하여 육지로 가는 여객선의 운항 계획이 없습니다." 라는 판에 박힌 말을 반복하여 들려줄 뿐이다. 언덕 위에 있는 인문관 교실 앞에 서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샛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섬의 북동쪽인 대섬 쪽에서부터 허옇게 뒤집어져서 파랑이 몰려오니 마치 수 만 마리의 흰 고래 떼가 한꺼번에 물 속에 들어갔다가 솟구치는 것 같다. 방파제를 넘고도 기가 쉽사리 꺾이지 않은 채 몰아치는 높은 파도 때문에 크고 작은 고기잡이배들이 방파제 안의 내항 한가운데에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정박하여 있다.   바다 날씨가 이렇게 궂어서 육지로 나가야 할 일이 있는데 나가지 못할 때면 '섬살이는 우리가 바다 한 가운데 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다가 우리 속 한가운데 들어와 있는 것'이라는 푸념 섞인 말이 실감이 난다. 뭍에서 살 때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해가 보이면 '오늘 날씨는 괜찮구나' 싶었는데 해는 말간데도 어찌 이리 뱃길이 끊기는 날이 많은지 섬에 살아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대부분의 직장 동료들이 가족과 떨어져 섬에 와서 혼자 사는 이른바 교육부 총각이 된 채 나날을 보내면서 자주 육지로 나가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날씨가 순조로워서 배가 다닐 때는 그리운 마음도 뱃길을 따라 가족이 있는 육지로 가는 듯하고 급하게 나가야 할 일이 있거나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나갈 수 있으니 아쉬움이 덜 하지만 요즘처럼 뱃길이 끊어질 때는 떨어져서 지내는 가족들과 이어진 마음의 끈마저 끊어지는 듯하여 더 쓸쓸하고 견디기 어렵다.   수만리 이국땅에 나가서 살아도 부모가 돌아가시면 하루 만에 올 수 있지만 이곳에서는 불효자식 아닌 불효자식이 되어서 마지막 가는 길마저 보는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으니 당사자의 회한이야 말해 무엇 하랴.  우리 같은 서민들이 이곳에서 헬기를 타고 육지로 나가는 경우는 죽을 고비에 이른 응급환자가 아니면 불가능하고 바람이 심하게 불면 그마저도 위험해서 갈 수가 없으니 생각하면 참으로 서글픈 나날의 섬살이다.   그러나 직장 때문에 섬으로 들어와서 겨우 몇 년을 이곳에 머무는 우리의 이런 푸념도 평생을 바다에 의지하고 살아가는 본토박이 섬사람들의 질박한 삶 앞에서는 한갓 사치스러운 이야기일 뿐이다. 10톤 미만의 작은 배를 몰고 파도가 잘 날이 없는 수천 길 깊이의 험한 바다로 날마다 나가서 고기잡이를 하는 어부들의 고단한 삶은 실제 나이보다 훨씬 더 들어 보이는 주름진 그들의 얼굴만 보아도 알 수 있으니 굳이 곁에서 지켜보지 않더라도 쉽게 짐작이 간다. 바다에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거친 풍랑이라도 만나면 한 마을이 거의 모든 집들이 제삿날이 같아지는 비극적인 사건이 곳곳에서 벌어지기도 하니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줄타기를 하는 삶이기도 하다. 단지 육지로 한 번 나가보기 위해서 해마다 열리는 도민체육대회나 학도종합체육대회에 선수로 뽑히려고 힘이 드는 운동부에 들겠다고 서로 먼저 손을 드는 아이들의 갇힌 삶에서 비롯된 동경의 마음은 또 얼마나 애절한가!   섬살이는 자연의 바다를 건너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과 동시에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격리된 채 살아야 하는 삶의 질곡도 헤쳐 나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그런 숙명을 깨닫고 자라는 섬사람들의 생활력이 육지 사람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며칠만 배가 들어오지 않으면 아이들이 먹을 분유마저 떨어져 고통을 겪던 지난날에 비하면 냉장고의 넉넉한 보급 등으로 사정이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물자가 귀하고 물가가 비싸기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가족과 떨어져서 이곳에서 혼자 생활을 하는 이른바 섬총각들이 별 탈 없이 몇 년을 넘기려면 먼저 자신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 섬에 와 있다고 해서 욕구를 쉽게 떨쳐버릴 수 없으니 나날의 생활이 온갖 유혹이 깔려 있는 지뢰밭을 헤매는 셈이다. 어떤 이는 잡다한 유혹을 뿌리치고 일에 몰두하여 좋은 결실을 거두기도 한다. 밤낮도 없이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자신의 특기를 살려 주변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거나 글을 잘 쓰는 소질을 살려서 시인이 되어 나가기도 한다.

  혼자 지내는 섬살이에서 술은 빼놓을 수 없는 친구지만 또한 넘어야 할 벽이다. 바다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술을 당기게도 하지만 매운 외로움과 싸울 때 술은 늘 막역한 친구로 곁에 있는 셈이다. 그러나 술은 중독성이 강하니 약해지는 의지 때문에 쉽게 의존을 하게 되고 마침내 그 폐해를 단단히 겪게 된다. 그래서 어떤 이는 벽지 근무를 통해 승진의 꿈을 안고 왔다가 술 때문에 폐인이 되어 돌아가거나 건강을 잃고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결코 만만치 않은 인생살이의 한 단면이기는 하지만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죽으라고 산에 오르기도 하고 바닷가를 미친 듯이 헤매거나 낚시에 몰두하여 남아도는 시간을 흘러 보내기도 하고 인터넷 바둑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외로운 세월은 더디게 가는 법이어서 말처럼 쉽지 않다.

  지난해 섬으로 처음 들어왔을 때 갑자기 바뀐 주변 환경 때문에 쉽게 술의 유혹에 빠져 지내다가 어느 날 시작한 달리기에 단단히 빠져들어서 이제는 달리기 위해서 기꺼이 술을 멀리하고 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따라다니던 술과의 질기고도 질긴 인연의 사슬을 쉽게도 끊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과의 싸움인 달리기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승진이라는 세속적인 출세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절제한 생활을 이겨내지 못하면 어떤 경우에도 결코 성공했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으므로 달리기를 통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낼 수 있다는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먹는 것도 부실한데 힘들게 달린다고 아내는 걱정을 늘어놓지만 나를 반듯하게 세울 수 있는 매력에 날마다 쉬지 않고 꾸준하게 달리고 있다. 그리고 혼자 달려서 섬을 한 바퀴 돌거나 육지에서 열리는 마라톤대회에 가끔 참가한다고 널리 알려진 탓인지 주변에서 함께 달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비록 섬에서 지낸 시간이 아직 두 해도 채 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변화가 많은 바다 날씨 틈바구니에서 용케도 배를 얻어 타고 자연의 바다를 건너는 법과 외로움을 견뎌내며 삶의 바다를 건너는 법을 함께 터득한 셈이다.   삶의 어느 길목이든지 기쁨과 슬픔이 같이 기다린다고 하니 지금은 그 두 가지를 다 만나는 때인가 보다. 길의 모퉁이를 지날 때마다 가끔씩 뒤돌아보며 살아가고 있는 섬살이의 나날은 오늘도 힘차게 이어진다.    (2002.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