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우리 부부가 처음 만난 곳이 남해다. 그때 나는 이미 교단에 선 지 서너 해가 지나 풋내기 신세를 갓 면한 때였고 아내는 교육대학을 막 졸업하여 우리 학교 건너편에 있는 초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아 왔었다. 사범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갔다 와서 발령 대기한다고 팔자에도 없는 제지공장에도 두어 해 다녔기 때문에 짧은 교직 경력에도 불구하고 내 나이는 서른이 넘어 있었고 아내는 갓 스물을 넘긴 때였다. 낯선 시골에 첫 발령을 받은 젊은 교사들이 흔히 그랬던 것처럼 나도 두어 해는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했는데, 그 다음 해에는 다행스럽게도 학교에서 백 미터쯤 떨어져 있는 사택에 들어가게 되었다. 방 두 칸에 부엌이 있고 널찍한 텃밭까지 딸린 그 동네에서는 보기 힘든 양옥집이었으나 사택은 이미 여섯 달 전부터 비어 있었고 짧은 경력과 독신이라는 불리한 여건에도 관계없이 독채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시골인지라 방세가 싼 탓으로 살림을 하는 선생님들이 굳이 사택에 들어갈 필요를 못 느낀 탓도 있었으나 무엇보다도 뚜렷한 까닭은 앞서 사택에 살던 서무주사가 비명횡사를 했기 때문이다. 밥보다 술을 더 좋아하던 그 서무주사가 병명도 확실하지 않은 병으로 갑작스럽게 주검으로 실려 나갔고 꼬리를 물고 떠돌던 해괴한 소문으로 사택은 흉가가 아닌 흉가가 되어 있었다. 꺼림칙한 면이 없잖아 있었으나 선뜻 사택에 들어간 까닭은 혼자 집세 없이 독채를 쓸 수 있다는 매력과 함께 내가 좋아하는 춘란을 비롯한 화분들을 여러 개 들여놓을 수 있는 대청마루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 해 겨울을 나면서 하숙방이 좁아서 밖에 두었던 화분들이 여러 개 얼어 죽어 속으로 무척 아까워하고 있을 때였다. 개학과 함께 사택으로 거처를 옮긴 뒤 사택 안팎을 물로 청소하여 묵은 먼지들을 씻어내고 방의 도배도 밝은 색으로 새로 했다 .
흉가처럼 버려져 있던 분위기 때문에 봄기운이 무르익을 무렵에는 제일 먼저 사택 주변을 일구어 꽃씨를 심었다. 읍내에 나가서 샐비어와 분꽃, 나팔 꽃씨를 사와서 텃밭에까지 다 심었다. 돌보지 않아서 거칠어져 있었으나 본디 농사를 짓던 땅이었으므로 싹들이 곱게 잘 자라 주었다. 보리가 필 무렵에는 농업을 담당하던 우 선생에게 배워서 국화 꺾꽂이를 했다.
그 무렵에 지금의 아내인 최 선생을 만났다.
해질 무렵에 시장 근처에 있는 가게에서 처음 만났다.
첫 만남 이후 묘한 예감 비슷한 것을 느낀 뒤로, 내 나이가 여나므 살이나 더 많은 결정적인 결격사유에도 불구하고 한번 사귀어 봤으면 좋겠다는 내 뜻을 전했고, 별로 말이 없는 편인 최선생은 별다른 거부의 뜻을 비치지 않았다.
그래서, 서른 한 살의 노총각 선생과 스물 두 살짜리 햇병아리 여선생은 남들의 눈을 피해 조심스레 몇 번 만났다.
먼저, 최선생 집에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겠다는 내 고집을 끝까지 세워 그 해 추석에 처음으로 최선생 집에 갔다.
문제는 갔다 온 다음이었다.
집에서 한사코 둘이 사귀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열 살 가까이 되는 나이 차이도 그렇고, 장녀인 최선생이 대여섯 해는 더 벌어서 동생들이 공부하는데 보태줘야 하는데 내 쪽에서 결혼을 서두를 것이므로 도저히 안 된다는 것이었다.
비교적 부모님들의 말에 순종하는 편인 최선생이었으므로 갈등이 생겼던 모양이었다. 샐비어가 집 주위에 빨갛게 핀 가을이 지날 무렵에는 나를 만나는 일을 피하기조차 했다.
아무리 떳떳한 처녀 총각이라 하지만 말 많고 좁은 시골에서 남의 눈을 피해서 만나는 일도 어려운데, 최선생은 번번이 읍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을 어겼고 나는 양어깨에 힘이 쭉 빠진 채 막차로 들어오곤 했다. 찬바람이 불 무렵에는 내 자신이 뚜렷한 결정이라도 내려야 하는 절박함을 느꼈다. 우리 집에서도 체념 반 애원 반을 섞어 결혼을 재촉했고, 그 해를 끝으로 남해를 떠나야할 사정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이라는 말을 덧붙여서 만나자는 약속의 편지를 띄웠다. 그러나 약속 장소에 최선생은 나오지 않았고, 삼 십리 가까운 산길을 막차를 놓치고 걸어 돌아왔다. 옆구리에는 마지막으로 전해주고 싶은 겨울 내복을 한 벌 사서 낀 채였다. 다음날 아침에 일찍 일어난 나는 흰 백지 위에 즐겨 외던 청마의 시 ‘행복’을 옮겨 적었다. 그리고 내가 반년동안 가꾼 국화 가운데서 가장 깨끗한 것을 하나 골라서 꺾었다. 흰 포장지에 싼 국화꽃 한 송이와 내복을 등교하는 동네 아이 편에 부치고 나니 눈물이 핑 돌았다. 허튼 욕심 같았고 서른 한 살의 나이가 부끄러웠다.
며칠 뒤 저녁 무렵에 처음으로 최선생이 내가 살고 있는 사택으로 찾아왔다.
어이없어 하는 내 앞에 수척해진 최선생이 잔잔한 웃음을 띤 채 다가왔다.
나는 말 대신 그저 최선생의 얼굴만 쳐다 볼 뿐이었다.
“꽃 잘 받았습니다.”
이 말 뿐 최선생도 말이 없었다.
(25년 전 영해고 재직 시절, 제 1회 쇳물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