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소쿠리/자작 시 모음

시골 버스 운전사의 독백

황포돛배 2008. 6. 17. 18:20
 

         시골 버스 운전사의 독백

읍을 벗어났다

돈이 없어 세금을 못 내 번호판을 빼앗겨

사흘을 서 있던 이 버스에

손님 한 사람 달랑 태우고 가니 차가 먼저 덜컹거린다

수심처럼 먼지가 따라오는 굽이 진 길을 돌아가니

나무들이 긴 팔을 흔들며 먼저 반긴다

개떡같은 오후라

속은 바글거리는데 햇살은 같잖게도 좋다

가운데 좌석에 앉아 통로에 두 다리 펴고

낡은 의자에 기대어 앉아

세월아 네월아 졸고 있는 혼자 손님 영감은 

낮술 한 잔 걸치고 살구나무 고개를 넘어 집으로 가며

모롱이를 돌 때마다 흔들거리며 졸고 있는데

의자에 묶인 사람처럼 넘어지지는 않는다


이제 내 삶도 가벼운 흔들림 때문에 허물어지지 않는다

차가 묶여 있던 며칠 동안

일없이 쉬는 것이 편안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난 뒤

나날을 단단한 사는 법을 익혔다

육법전서의 법은 판사의 입을 빌려 잘 다니던 차를 묶지만

내 사는 법은 수시로 나를 묶는다

내 살아가는 법에 대한 다른 이들의 거부는 새삼스러울 것조차 없다

오랜 습관이 낡은 상념으로 남아있어도,

내 몸 안에 있으나 받아들일 수 없는 손바닥의 굳은살이라

껍질 속에 숨어 벌거벗은 나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젊은 시절 이래로 한 때는 내가 가진 것들이 가치가 있어

자랑스럽다고 여겨

필요에 따라 수시로 남이 가진 모든 것과 바꿀 수 있다고 믿었는데

이제는 아무 것과도 바꿀 수가 없다

난전의 옷가지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낡았다

가령 그것이 무슨 색이든

아주 터무니없이 천박한 무늬의 옷감으로 만들었다해도

남들의 시선을 끌지 못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한시적인 생명을 지닌 것들은 쉽게 버릴 수 있으나

내 삶은 폐기할 수 없는 위험물이다


읍을 벗어나도 되돌아오는

일탈 없이 궤도 위를 달리는 예정된 나날들

사라질 수도 머무를 수도 없는 물처럼

시간표에 매여 움직이는 차처럼

차를 운전하는 나도 차와 같이 시간에 묶여

날마다 돌아온다


이럴 때도 속을 감추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인가

때때로 깊은 병은 그 자체보다

감추는 일이 더 병적이라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