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소쿠리/자작 시 모음
마흔 둘의 가을, 비가 오는 저녁에
황포돛배
2008. 6. 17. 18:14
마흔 둘의 가을, 비가 오는 저녁에
우리들 가운데 누구라도 지나온 삶의 장면들을 모두 기억하지 못한다
갓 지나온 삶이라도 세세한 장면들은 기억하지 못한다
가령 아무 날 아무 때에 아무 곳에서
안개비 엿보던 나는 혼자였던가
그러다가 어느 틈에 빗방울이 굵어진 것도 모른 채 오던 길을 그냥 지나쳐 왔던가
그대를 닮은, 맞은 편에서 오던 단정한 긴 머리채의 처녀가 나를 먼저 쳐다보았는가
그녀가 돌아간 골목길을 내가 오랫동안 쳐다보았는가
어둠 속에서 나무가 울고 있었던가
나무 곁에서 내가 울고 있었던가
젖은 옷이 속까지 다 말라버린 이제,
어둠 속에 서 있는 나무들이 여전히 소리를 낮추고 있으므로
되묻는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다
어깨 위에 걸치고 있던
얇은 옷이 젖어 무거웠다는 것이 아픈 통증으로 확인되지만
한참 지난 지금의 기억으로,
중병을 앓은 사람처럼 어둠에 잠긴 낯익은 길을 꿈속처럼 헤매다가
아무 곳으로도 갈 수 없던 절박한 그 때의 처지를
내 스스로 더 낭만적이었다고 진단을 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내가 간 그 곳에 그대가 있었는가
내가 말없이 돌아섰는가
언제였던가, 비가 오던 그 날이.